중국

중화주의와 대한족주의: 중화제국의 민족주의 이중 탄압 구조에 대해

계연춘추 2021. 7. 5. 16:15

《左傳∙定公十年》:“中國有禮儀之大,故稱夏;有服章之美,謂之華。”
[唐]陳黯《華心》:“夫華夷者,辯在乎心。辯心在察其趣向。有生扵中州而行戾乎禮義,是形華而心夷也;生扵夷域而行合乎禮義,是形夷而心華也。”
[元]郝經《與宋國兩淮制置使書》:“今日能用士,而能行中國之道,則中國之主也。”
[明]太祖《諭中原檄》:“自古帝王臨御天下,皆中國居內以制夷狄,夷狄居外以奉中國,未聞以夷狄居中國而制天下也。……如蒙古、色目,雖非華夏族類,然同生天地之間,有能知禮義,願為臣民者,與中夏之人撫養無異。”
[清]世宗《大義覺迷錄》:“自我朝入主中土,君臨天下,幷蒙古極邊諸部落,俱歸版圖,是中國之疆土開拓廣遠,乃中國臣民之大幸,何得尚有華夷中外之分論哉。”

한국 교수들과 기자들의 글을 살펴보다 보면 이들이 예외 없이 “중화주의中華主義(내향적 제국주의)”와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혼동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양자 모두 “화이지변華夷之辯”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성질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지정학적 조건에 의해 확립된 영토를 기초로 하는 초인종적 문화 이데올로기 공동체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내향적 제국주의(수탈 대상은 외부보다는 중국 내부의 민간자본이다)이라면, 후자는 주변부 세계에 한족漢族의 정치∙문화적 우월 지위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외향적 팽창주의(침략 대상은 주변부 국가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내 정치권과 학계의 대중국 전략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상만을 제시하는 까닭은 중화주의와 대한족주의 사이의 미묘한 균형관계를 서구식 내셔널리즘의 틀로 이해해버리는 바람에 정치적 방향성이 다른 행위를 모두 내셔널리즘 운동으로 이해하고, 미래 중국의 정치적 행위를 예측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런 중화주의와 대한족주의의 균형을 조사하다 보면 우리는 국내 연구자들이 화이지변을 단순한 민족 우월주의로 생각했음을 발견하게 된다(이런 잘못된 해석의 이면에는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극우 인종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화이지변에서 비롯된 중화주의와 대한족주의의 차이와 양자가 향후 중국인들의 정치적 행위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 고민해보도록 하자.

주나라 무왕武王이 천하의 패권을 확립했을 때부터 주나라 사람들은 소수 인종으로 자신들보다 인구도 많은 은나라 유민들을 포함한 다수의 이민족을 지배해야 한다는 정치적 난제에 직면했다. 당연 이들은 지배계급 사이의 문화 공유를 통한 문화적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런 문화적 공동체 구성원 간의 혼인을 독려함으로써 문화적 공동체를 점차 하나의 혈연 공동체로 만들었다. 따라서 화이지변의 화華는 처음부터 인종적인 공동체라기보다는 주나라의 예악 문화를 공유하는 문화적 공동체이며, 혈연 관계는 이와 같은 문화적 공동체의 공동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러나 진나라의 천하 통일 이후, 중국은 문화적 공동체 의식을 가진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기에 이른다. 이후 진시황은 자신이 만든 제국의 지정학적 위협 요인을 제거하고자 흉노와 백월, 서남이, 고조선 등 주변부에 위치한 이민족들을 정벌한다. 이와 같은 중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한나라 때도 지속되는데, 한무제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진시황제가 정벌했던 나라들을 다시금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서역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대완大宛)까지 공격함으로써 제국의 영토를 지정학적 한계선까지 팽창시켰다. 이어지는 한제국의 400년 통치기간 동안, 제국은 내부적으로 상이한 경제활동을 하는 집단들의 불편한 동거가 지속되었다. 비록 이들은 정치적으로 한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였지만, 한제국의 지배는 어디까지나 이 일대에 거주하는 농경민에 국한되어 있었고, 한제국이 강요하는 농경문화를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호胡, 강羌, 만이蠻夷, 예맥濊貊의 무리가 같이 살았다. 이들은 제국이 만든 행정거점과의 무역을 통해 부족한 물질 수요를 채우기도 했지만, 간혹 정상적인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식량이 지나치게 적을 경우, 이들은 약탈자가 되어 제국의 통치 거점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한족漢族은 점차 제국이 설정한 지정학적 경계 내에서 농경생활을 영유하며 중원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을 뜻하게 되었으며, 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져야만 했다.

그러나 한제국이 와해되고, 중원 지역이 이민족들에게 점령되자 기존 한족 공동체 개념은 다시금 흔들리게 된다. 중원지역은 소수의 유목민족들이 다수의 중국인들을 지배하야 하는 반면, 남쪽은 상대적 다수에 불과한 한족이 적지 않은 만이제부蠻夷諸部을 지배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원지역의 유목민족 황제들은 자발적 시민화와 한인 귀족과의 통혼 등 정치적 수단을 이용해 호한의 문화적 경계를 허물었으며, 강동 지역에 자리잡은 군주들은 자신들의 영내에 거주하는 만이제부를 한화漢化시켰다. 그리고 황제는 제국의 이데올로기적 공동체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종족 사이의 문화적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실제로 6-7세기로 넘어가면 중국 내부에서는 종족 대립보다는 남북의 문화∙이데올로기적 대립이 더 부각된다. 쉽게 말해 보다 본질적인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내세워 종족 대립을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지워버린 것이다(종교도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화이의 인종적 경계는 이렇게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당연 당제국 시대에 중국은 더 이상 종족주의적 국가가 아닌 이데올로기적 현세 화신인 황제가 지배하는 문화∙이데올로기 공동체를 뜻하게 되었으며, 제국은 다시금 지정학적 최대 진출선까지 제국의 경계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당제국은 유목민족들을 복속하는데, 제국은 이들에게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했으며,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 동안 제국의 기미 지배를 받아들인 고비사막 남쪽의 유목민족들은 당제국 계승의식을 가지게 된다. 당나라 후기에 이르러 제국이 해체될 위기에 직면하자 카를룩, 거란, 사타 등 여러 유목민족들은 당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중국식 행정체계와 궁전문화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이를 빌미로 중원 진출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사타제국주의沙陀帝國主義(후당)와 그 후신(북송)이 지배하는 중원 지역에는 사뭇 다른 중화의식이 태동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당제국 시대 군현을 두어 지배했던 내지만을 중화의 지리적 경계로 설정하고, 이 지역 안에 사는 문화∙이데올로기적 공동체성을 가진 자들만 한족이라 주장했다. 이와 같은 의식의 태동에는 거란, 사타제국주의 등 유목민족들의 당제국 계승의식에 대한 반감이 자리잡고 있다. 당제국의 이원제국 지배체제는 중국식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국가를 운영하는 고비사막 이남의 모든 유목민족들에게 중화제국의 계승자 지위를 부여했으며, 이들에게 북송의 중화제국 적자 지위는 현실적인 힘에 의해 언제든지 부정 받을 수 있는 취약한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송나라는 지리적, 인종적 차이를 부각함으로써 자신들의 적자 지위를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이런 인종주의적 중화주의는 중원지역을 빼앗긴 남송 시대 이르러 강화된다. 중원지역의 사실로 더 이상 지리적인 요인에 따른 제국의 적자 지위를 주장할 수 없는 남송 사대부들은 한족과 거란, 여진족의 인종적 차이를 부각해 자신들의 중화제국 적자 지위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북방의 사대부 집단은 당나라 계승의식이 전무한 새로운 이민족 통치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는데, 이 문제를 놓고 금나라 황실은 의외로 북중국 사대부 계층이 원하는 대답을 제시했다. 여진족은 빠르게 도시화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식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연 북송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지역주의, 인종주의적 중화주의를 통념으로 받아들인 북중국 사대부 계층은 인종주의를 포기하고,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중화주의를 해석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중원지역을 지배하면서 중국식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정치를 실행하는 정권이야 말로 중국이며, 이들의 혈연적 요소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중국식 문화공동체 이상은 점차 인종주의적 중화주의와 지역주의적 중화주의로 나뉘게 되는데, 이를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인종주의적, 지역주의적 중화주의와 사타제국주의

이와 같은 중화주의의 내적 대립은 명나라, 청나라에 이르러 지속되며, 제국의 지배자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인종주의적 중화주의 노선을 견지했다가 지역주의적 중화주의로 갈아탔다. 일례로 인종주의적 중화주의를 내세워 원나라의 통치를 타도한 홍무제조차 중국 영내에 살면서 중국식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몽골족, 색목인을 한족과 똑같이 대우하겠다고 선포했으며(《논중원격》), 한술 더 떠 영락제는 “호한은 본래 한 집안”이며, “화이의 구분은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종족주의적 중화주의에 입각해 유목민족 통치를 타도한 이들이 막상 제국의 지배자가 된 이후, 지역주의적 중화주의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까닭은 오랜 세월 이민족의 통치를 받는 과정에서 중원지역의 인종구성이 지나치게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홍무제, 영락제 모두 제국의 영역을 툴루이 일가가 지배하는 막남한지漠南漢地 전역으로 확장하고 싶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건설하는 한족 중심의 세계제국에서 종족주의 대립이 정치적 안정을 해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다만 명나라의 중화주의를 지역주의적 중화주의로 보기에는 곤란한다. 분명 명제국의 황제들은 이민족에 대한 차별 없는 대우를 약속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족 중심의 통치체제를 받아들이는 이민족에 국한된 일이었으며, 이들은 기본적으로 종족주의적 중화주의에 입각해 대외정책을 결정했다. 이들에게 자신들의 제국 영내에 사는 이민족은 동화의 대상이자, 지배의 대상이지, 결코 이들이 종족주의와 혈연주의로 뭉친 한족들을 지배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러나 다시금 이민족 지배체제를 확립한 청나라는 인종주의적 중화주의를 억압하는 대신 지역주의적 중화주의 제국을 표방했으며, 만주족 황제는 유학적 이데올로기를 중국 땅에 실현함으로써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믿었다. 당연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 과정에서 인종주의적 중화주의에 입각한 서술은 의도적으로 지워지거나 삭제됐으며, 청황실은 문자의 옥을 통해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에 의구심을 품는 지식인들을 탄압했다.

이런 정치적인 요소 외에도 지역 거주형태에 따른 외부 세력에 대한 인식 또한 중국 내 상이한 중화주의 대립이 가능케 한 문화적 요소였을 수도 있다. 일례로 남중국의 경우,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대다수 부족 구성원이 중세시대 요새를 떠올리게 하는 집단 거주지역에 살면서, 다른 씨족의 침입을 경계한다. 이들은 혈연주의와 부족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덩달아 종족주의적 중화주의 의식이 강한데, 이들에게 외부 세력은 침입자이자 약탈자이며, 부족 공동체의 연합을 통해 물리쳐야 하는 적대 세력이지, 대화 상대가 아니다. 반대로 도시문명이 발달하고 이민족을 접촉할 기회가 많은 중원지역의 사람들에게 다른 문화 생활을 가진 이들과의 동거는 너무도 흔한 일이고, 서로의 문화 생활을 존중함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꾀할 수 있다 믿었다. 이 같은 지역적 거주형태 차이에 따른 외부세력 인식 또한 중국 내부에서 상이한 중화주의가 유행할 수 있던 배경일지도 모르겠다.

남중국의 종족주의적 중화주의는 근대에 이르러 청나라의 통치를 타도하는 혁명 구호가 되기도 했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세우자는 구호의 이면에는 한족 정권이 중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종족주의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실제로 국민정부 집권기 동안, 소수민족은 동화同化의 대상이고 통치의 대상이었지,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대상은 아니었다. 당연 이 같은 국민정부의 소수민족 동화정책(동화라고 하나 실상은 소수민족에 대한 강압적 통치였다)은 좌익 사회주의 정치인들에 의해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라 불렸는데, 이런 소수민족 동화정책에 대한 반발로 삼구혁명三區革命 같은 내셔널리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국민정부의 소수민족 정책 실패를 거울삼은 중국 공산당은 집권 초 소수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모습을 취했지만, 이와 같은 정책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집단에게 국한되며,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자치권 확보 내지는 독립 시위를 일으키는 인종주의 집단(티베트, 위구르)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통치를 실시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정부가 표방하는 근대적 중화주의는 종족주의보다는 지역주의에 입각한 중화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그런데 생각해보면 중국공산당 초기 멤버 가운데 서남쪽 소수민족 출신들도 많아서 필연적으로 국민당보다는 소수민족 처우가 좋을 수밖에 없다). 근대적 중화제국은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 확립된 국경선 안쪽에 사는 지역∙인종∙종교 집단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며, 중화제국의 통일성을 위해 각 인종 집단이 가진 고유한 민족의식과 문화를 포기하고 자신들이 새로이 규정한 근대적 삶을 살 것을 강요한다. 이와 함께 제국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통치의 영속성을 위해 영내 대한족주의 지식인, 운동가를 탄압하는데, 제국이 보기에는 이들도 제국의 통일성을 무너트리는 분열주의자와 다를 바 없는 “정치적 반동분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 정부의 민족주의 탄압은 결코 소수민족 독립운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족 내부의 극단적 민족주의도 포함된다. 따라서 제국의 통치 체제와 민족주의 탄압은 아래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진다.

중화제국 체제 하의 민족주의 이중탄압 구조

이 그림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제국은 결코 독립 지향적인 소수민족만을 탄압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 과거 명나라와 중화민국을 있게 했던 대한족주의 또한 정치적 탄압 대상이다. 그리고 중앙정부는 제국체제 하에서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엘리트 계층과 소수민족을 이용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한다. 물론 위구르와 티베트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인종 집단도 있지만, 제국은 대륙의 복잡한 인종적 구성을 역이용해 다수 인종에 저항하는 소수인종을 규합하여, 또 다른 다수를 만들어낸다. 일례로 위구르의 경우, 제국은 사릭 위구르족과 카자흐족, 회족, 그리고 청나라가 일리 협곡에 이주시킨 여러 퉁구스어계 민족들을 단합해 이들을 감시하며, 티베트의 경우, 칭하이의 몽골족과 위구르족, 판첸라마 지지 세력, 그리고 친중 귀족 출신인 티베트인 관료들과 티베트 문화를 영유하지만 이들과 인종적 연대감이 없는 강족 부족을 이용해 독립 운동을 억압한다. 비록 특정 지역에서 위구르인과 달라이라마 추종자는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할지는 몰라도, 이들의 독립의지는 중화주의 제국이 설계한 정치∙인종적 대립구도와 침묵하는 다수에 의해 좌절을 맛보게 된다.

이와 같은 대륙의 인종적 특징은 분명 한반도에서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민족국가 건설이 당연하다고 배워온 이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래서 국내 지식인들은 티베트와 위구르 문제를 바라볼 때, 그들이 보고싶은 사실만을 본다. 일종의 확증 편향인데,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일례로 위구르가 독립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삼구혁명 당시 한족뿐만 아니라, 다른 퉁구스어계 출신 이주민(심지어 이들이 청나라 중기에 일리협곡으로 이주했음을 생각해 보자)들도 위구르, 카자흐족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죽임 당했는데, 그런 경험을 했던 이들이 과연 위구르족 독립운동을 지지하겠는가(심지어 이들은 신장 북부 지역 도시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또한 위구르족과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중국 내 카자흐족과 회족이 과연 위구르 독립을 반기겠는가?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대륙의 인종 구성과 거주 환경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듣고 싶은 정보만을 취하며,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시킨 다음 자신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정확히 베트남 전쟁 이전에도 이와 똑같았다). 오히려 제국체제는 공동의 적이 출현함으로써 강해지고, 중국 정부가 규합한 소수자들의 연대가 상대적 다수인 위구르와 달라이라마 지지자들을 탄압하는 구도가 강화될 것이다.

역사상 어떤 제국체제도 강압만으로 유지되는 경우는 없다. 특정 세력의 지정학적 지배가 270년 가까이 진행됐다는 뜻은 이 일대의 인종적, 정치적 상황이 외부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다는 뜻이다. 중화제국은 이런 여러 인종집단 사이의 틈을 이용해(때로는 같은 인종의 지리적, 종교적 차이를 이용해) 자신의 제국주의적 통치를 확립하기에 여러모로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정밀타격이 필요한 곳에 핵무기를 떨어트리면 민간인 피해만 늘어날 뿐이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또 다른 복수심에 불타는 적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런데 국내 학자들의 내셔널리즘 국가 의식이 너무도 강하다 보니, 복잡한 문제를 자꾸 단순화시키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현실적인 정책이 나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한국인의 뇌리에 뿌리 박힌 극우 내셔널리즘을 배척해야 비로소 정치∙지역∙인종 요소에 의해 분열된 내륙 아시아의 실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예전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현재 한국의 위구르, 티베트 연구 자료는 한쪽(독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 내가 말하는 “사료적 균형”이란 중국정부에서 발표하는 이데올로기 편향성이 강한 선전물과 위구르∙티베트의 내셔널리즘 운동을 지지하는 사료 사이의 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솔직히 중국정부 선전물은 사료로 보기에 민망하다). 신장 지역에는 위구르족 뿐만 아니라, 한족과 여러 퉁구스어계 민족, 몽골, 카자흐 등 다양한 인종집단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도 후세 사료로 사용될 만한 여러 기록물을 남겼다. 이런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내륙 아시아 지역의 복잡한 종교∙인종 문제 파악이 가능하지, 특정 정치적 행위만을 지지하는 자료만을 접할 경우, 지금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만 계속 할 뿐이며, 결과적으로 중국의 지정학적 지배의 영속성만 공고해질 가능성이 크다. 한 마디로 우리는 지금 불을 끄겠다면서 불 난 집에 기름 붓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한반도 통치는 강압적이었지만 정교하지 않았고, 소수 인종집단 규합을 통한 통치체제를 구축하기에는 한반도의 인종은 지나치게 단일화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통치 기간도 짧았다(36년). 그런데 중국 내륙지대 상황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대륙의 인종적 분포와 인종 내부의 종교∙문화적 대립 구조(ex. 위구르와 사릭 위구르의 대립,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 세력의 대립)를 알아야 제국의 통칙구조를 알 수 있고, 이와 같은 통치구조를 파악한 다음 중국의 소수민족 억압 정책을 비판해야 그나마 현실성 있는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처럼 (내셔널리즘을 국시로 삼은) “한국적 상식(문제는 이 상식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에 있다)”으로 이 지역의 인종 종교 문제를 접근할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킬링필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염려된다.

때로는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민족국가론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대륙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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