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고구려본기∙모본왕기》에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온다.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이는 《후한서∙광무제기》에도 나온다. 단지 행위의 주체자가 고구려가 아닌 요동외요의 맥인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요동외요의 맥인은 고구려 또는 양맥, 소수맥 등이 있다. 아마도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맥인 연합체의 군사 시위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기사의 진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말들이 있지만, 이어지는 《태조왕기》애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병사의 침입을 대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거짓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중국 한나라 때 변군邊郡 지배 방식을 생각해보면 이민족 부락과의 잡거는 흔한 일이었기에 고구려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오환, 선비족의 지지를 받아 요서 지역에 잠시나마 거점을 확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실제로 《유리명왕기》에 보면 고구려가 선비족의 침입을 격퇴한 다음, 속국으로 삼았다고 하니(물론 여기서 속국 운운은 과장된 표현이고 실제로는 선비족과 조공체제를 모방한 교역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고구려가 요서 지역에서의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오환, 선비족의 지지를 확보하고, 이들의 영지에 무역 거점 역할을 하는 성을 쌓아 중국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기록도 이해될 수 없는 기록은 아니다. 내 궁금증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왜 어양에서 광양, 탁군 등지로 남하하지 않고, 상곡과 태원으로 갔는가 하는 부분이다. 인구와 농업 생산량을 고려하면, 고구려는 당연 어양에서 남하해 광양, 탁군으로 가는 것이 정상이지, 굳이 더 멀리 떨어진 상곡과 태원까지 공격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이상하게 많은 정보를 누락한 상태에서 독자들의 지적 능력을 시험하고 있다.
오늘 북령산北靈山에 올랐다. 대체로 태행산맥太行山脈 동단에서 출발해 북령산과 연산산맥燕山山脈을 넘어 천진관까지 이르는 루트였는데, 총 18km를 걸었다. 걷는 과정에서 나는 태행산맥과 연산산맥의 지세를 유심히 살펴봤는데, 태행산맥까지는 그래도 말을 타고 산에 오를 정도로 지세가 완만하지만, 연산산맥에 들어서는 순간 돌과 자갈, 그리고 바위가 산을 덮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실상 걷는 도중에 가장 어려운 구간이 태행산맥보다는 연산산맥의 나무와 바위를 지나는 루트였음을 생각하면, 현대인들도 오르기 어려운 곳에 장성을 쌓은 명나라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해발고도는 높지만 완만한 산맥이 연이어진 태행산맥을 보고 나는 《모본왕기》의 기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고구려인들은 연산산맥 방어선 돌파에 실패했다.”
예로부터 연산산맥의 지세가 너무도 험하다 보니 고북구古北口, 가봉구嘉峰口, 청산구青山口, 냉구冷口만 잘 지켜도 유목민족의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태행산맥 서쪽에서 베이징 방면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거용관과 바다에 인접한 산해관-노룡구 일대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인데 고구려인들의 초기 목적지는 광양과 탁군 방면이었을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은 우북평에서 어양으로 이어지는 고대 교통로를 따라 약탈을 자행하며 남쪽으로 전진했지만, 끝내 연산산맥의 지세를 이용한 방어선 돌파에 실패하는 바람에 그나마 (말 타고 산을 넘을 수 있을 정도로) 산세가 덜 험준한 태행산맥 서쪽 방면으로 진출했고, 이 과정에서 상곡으로 진출한 다음 태원까지 습격한 것 같다. 그러나 상곡에서도 거용관 돌파에는 실패하고 거용관 서쪽 한인 촌락을 노략하는데 만족해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인들은 칭기즈칸과 홍타이지가 넘었던 연산산맥 방어선 돌파에는 실패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혹 재야사학자들이 고구려가 중원의 지배자도 될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주장하는 사람들은 연산산맥 한번 넘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연산산맥을 넘는 내내 우리 일행은 절벽처럼 가파른 산세와 바위, 그리고 100년 이래 최고라 하는 홍수로 인해 파괴된 도로를 지나면서 산을 넘어야 했다. 이런 산 위에 장성을 쌓은 사람들도 대단하지만(대신 석재는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방어선 돌파에 성공한 칭기즈칸과 홍타이지에 대한 경외심도 저절로 생겨났다. 즉 고구려가 과거 중원에 진출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있었는데 실패했을 뿐이지.
물론 혹자는 태원도 중원이라며 반문하겠지만 나는 태원까지 진출했을 당시 고구려 군대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었다고 생각한다. 태원의 북쪽에 위치한 운중雲中, 오원五原, 안문雁門 일대는 한나라 때 정예병력이 주둔하는 곳이며, 몇몇 유목민족들이 대 일대 방어선 돌파에 성공해 태원까지 진출해도 북쪽에 있는 정예병력들이 태원 방면으로 남하해 이들을 격퇴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물며 당시 오르도스와 연산산맥에 배치된 정예병력의 수는 약 15만 명(동한 시대 총 병력이 29만 1천 명이었다), 고구려군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도 연산 방어선과 오르도스 방면에서 남하하는 병력에게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서의 기록을 믿는다는 전제 하에) 태원까지의 진출이 가능했던 까닭은 광무제의 군사 정책 때문인데, 당시 막대한 군비지출을 부담하기 싫었던 광무제는 변군에만 정예병력을 배치하고, 내지內地는 비어두는 정책을 실행하다 보니, 일단 상곡 방면에서 태행산맥을 넘는데 성공한 고구려군의 습격을 막을 만한 병력이 애초에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고구려 모본왕의 태원 습격은 일종의 “빈집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모본왕기》의 기록 자체는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만 이 기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랑할 만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변군 뿐만 아니라 내지에도 거대 병력을 주둔시켰던 한무제 시대였다면(당시 중국의 병력은 112만 5천명으로 추산된다) 태원까지의 돌파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물며 이조차 변군에 위치한 중국군이 지키는 거점 돌파에는 모두 실패하고 그나마 자연 지형상 넘기 쉬운 (그러나 군사적 모험이라 할 수 있는) 태원 진출을 시도했지만, 이조차 처음부터 점령을 위한 군사 행동은 아니고, 한나라에 대한 일종의 군사 시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모본왕 대 태원 진출은 역설적이게도 고구려가 연산 방어선 돌파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중원의 지배자가 될 수 없던 군사적 이유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고 보고 싶다.
※ 우북평의 위치에 대해서는 말이 많을 것 같은데 나는 동한 중엽 이전까지는 그래도 우북평이 서한 시대와 동일한 곳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본다. 우북평군의 이치 문제에 대한 글을 찾아봐도 이 부분에 대해서 특별히 연구를 깊게 한 연구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 태원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군을 잘못 쓴 것 같은데 증거가 없으니 일단 태원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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