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알난하위斡難河衛와 멸호산滅胡山

계연춘추 2021. 7. 3. 17:32

1369년, 명나라에서 오논강 유목민족들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위소로 오늘날 몽골공화국 동부 오논강 유역 모처로 추정될 뿐이다. 그러나 타타르의 흥기로 유명무실한 변위로 전략했으나, 1406년 영락제가 오논강에서 타타르 수장 본아실리를 격파한 다음, 칭기즈칸이 일어난 부르한 산 인근 산봉우리 이름을 멸호산, 오논강의 이름을 현명하로 바꾸었다. 1410년, 영락제는 다시금 오논강 유역에서 본아실리 군대를 격파하고, 몽골제부의 사신들을 영접했다. 이때 영락제는 치타강 유역에 걸탑하위를 설치한다(걸탑하위는 중국 역사상 최북단에 설치된 행정구역이다). 이후 1411년 알난하위에서 사절을 보냈다는 것으로 보아 명나라 선덕제가 만리장성 이북 지역에 대한 철군을 결정하기 이전까지 오논강 유역은 명나라의 세력권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담기양 《중국역사지도집》의 일부. 이 지도의 맨 왼쪽 상단에 보면 알난하위 이름이 보인다.

알난하위의 설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본아실리를 격파한 직후, (당태종이 동돌궐을 격파한 직후 천가한 칭호를 받은 것과 같이) 영락제는 막북제부의 종주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명나라가 경영에 힘쓴 몽골 동부 지역(후룬호에서 부르한 산에 이르는 초원 지대)은 예로부터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툴루이 가문과 齊王, 廣寧王 등 몽골 동도제왕東道諸王*의 영지로 정치적 상징성이 큰 지역이라 할 수 있는데, 영락제는 이 지역을 명나라의 지배 권역에 편입시킴으로써 북원의 소멸과 명나라가 새로운 제국체제의 중심임을 선포했다. 특히 본아실리와의 전투 직후 영락제가 부르한 산 인근 산봉우리 이름을 멸호산(滅胡山, 오랑캐를 진멸한 산)이라 바꾼 것은 칭기즈칸을 모욕함과 동시에 몽골제부의 종주권이 몽골 대칸에게서 (당나라 때와 같이) 다시금 중국 황제에게 돌아왔음을 알리는 정치적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알난하위 설치로 영락제는 ①한지漢地 군현, ②변위邊衛, ③내외 토사로 구성된 제국체제는 완성된 것이나 다를 바 없으며, 이 체제는 제국의 주인이 바뀐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물론 영락제의 막대한 군비 지출로 인해 명나라는 영락제 사후 기존에 진출한 막북 지역에서 철수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중화제국이 몽골과 한지, 서남의 내외 토사를 포괄하는 개념이고, 명나라의 영역은 원나라 툴루이 가문이 지배했던 영역(원나라의 강역)과 일치한다는 것을 대내외에 선포한 중요한 정치적 행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중국식 제국체제는 변위 설치로 인해 경제적 이중성을 띄게 되는데, 당나라 이후 중원의 황제는 막북의 지배자였을 뿐만 아니라, 유목민족들도 자신을 중화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중국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게 된다(심지어 카를룩이 세운 카라한 왕조의 군주들까지 자신을 타브가츠의 왕이라 칭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화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몽골족의 등장은 제국질서의 와해로 생각되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에 의해 제국질서는 새롭게 규정되고, 한지와 유목세계의 지배자라는 이중성은 다시금 부활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중성의 배후에는 경제적 요인이 따른다.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초원지대의 낮은 생산성 때문에 이들은 항상 약탈자가 되어 중국을 공격해야만 했으나, 중화제국의 지배자가 이들의 안정적인 물자 공급과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자, 이들은 빠르게 새로운 세계질서에 편입되었다. 이제 초원지대는 이와 같은 중화제국이 규정한 세계 질서를 받아들이는 자들과 이에 저항하고 거부하는 자들로 나뉘었다.

따라서 영락제에 의해 완성된 중화제국의 개념은 한인漢人 제국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제국은 자신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유목민족들과 한지 정권의 싸움이 되었으며, 중화제국의 후신을 자처한 유목제국은 빠르게 중국화되었다(그런데 이런 현상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애초에 이들은 중화제국의 지배자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이 이데올로기적 연대로 뭉친 제국체제는 인종을 뛰어넘는 이념적 합의에 기초하며,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유학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모두 제국의 신민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국은 자신의 관용성과 경제력을 힘으로 주변부를 흡수하고, 자신들의 세계질서를 강제했다. 그리고 이 세계질서로 규정된 제국의 영토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몽골 동도제왕東道諸王이란 부르한 산 동쪽을 분봉 받은 몽골 제왕-야가也可(광녕왕廣寧王 봉지), 과이심科爾沁(또는 호아진好兒陳, 제왕齊王 봉지), 찰한察罕(제남왕濟南王 봉지), 산양山陽(요왕遼王 봉지) 4부를 뜻한다. 영락제가 알난하위, 걸탑하위를 설치한 곳은 원나라 광녕왕이 분봉 받은 야가만호也可萬戶 목축지로 부르한 산 동쪽 치타강과 오논강, 케룰렌강 유역에 걸쳐 있다. 멸호산은 대체로 이 일대 모처로 추정될 뿐인데, 이곳에서 부르한 산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즉 칭키즈칸이 제국을 건설한 부르한 산 바로 아래 영락제의 멸호산이 있는 샘이다. 실제로 칭키즈칸이 유년기 시절을 보낸 부르한 산 인근 지역이 어느 곳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멸호산은 부르한 산 그 자체일수도 있다. 이 같은 추정이 사실이라면 영락제의 북벌은 몽골족에게 있어 크나큰 치욕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적어도 이 당시 영락제에게 몽골 동도제왕이 모두 복속한 것으로 보아 당시 몽골 동부의 종주권은 명나라에게 넘어갔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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