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은 말갈의 후예를 가리키는 말로 발해인과는 구분된다. 발해인은 대체로 목단강과 두만강, 압록강 중상류 유역에 거주하던 말갈, 부여, 고구려인의 후예로 보이는데, 이들은 요나라의 사민 정책에 의해 요서와 요동 지역으로 이주한 상황이었으며, 발해국이 망한 틈을 타서 오락후, 남실위, 흑수말갈 등 수렵민이 목단강, 두만강 유역으로 남하하여 남은 말갈인들과 잡거하게 되는데 이들을 여진족이라 부른다. 이들 중 북류 송화강과 송요평원(과거 부여 땅이다)에 살며 농경-수렵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도시 문명을 영유한 자들을 숙여진이라 부르며, 반대로 동류송화강, 아무르강, 목단강 유역에 살며 어업과 수렵을 병행하는 이들을 생여진이라 부른다. 한때 이들은 중원의 패자였으나, 몽골족에게 격파된 이래 나라를 잃고 몽골제국에 예속되었다. 몽골은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 개원로, 동녕로, 심양로를 두고, 여진족, 고려, 요동제부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①심양로: 요동 중부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치소는 심양.
②요양로: 요동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치소는 요양.
③개원로: 동요하 일대의 여진족과 몽골족(이들 중 원래 숙여진인 부족들도 있다)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치소는 개원. 아래 함평부가 있었다.
④동녕로: 고려 낙랑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 치소는 평양. 아래 도호부와 정원부가 있었으나 폐지되었다.
⑤합란부∙수달달등로: 과거 일본 학자들은 합란부를 쌍성총관부로 보지만 중국의 사학자 맹삼 선생은 《청조전기》에서 합란부를 한반도에 두는 것은 불가하다며, 이를 호이합부와 연관시켰다. 이 경우, 합란부는 목단강-아무르강 유역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패고강, 알타연, 호리개, 도온, 탈알령 등이 송화강-아무르강 수로운송과 밀접한 지역에 배치된 것으로 보아, 합란부도 송화강-아무르강 인근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이로 보건대 당시 원나라는 요동을 직접 지배함과 동시에 자신들에게 예속된 고려인과 여진족, 몽골족을 지배하기 위해 여러 통치기구를 요동일대와 한반도 서북부에 두었는데, 대체로 이런 기구들은 상하관계조차 명확하지 않았으며, 관할 구역도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를 벗어나면 몇몇 거점만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원나라의 여진족 통치를 명나라도 그래도 이어받은 것 같은데, 명나라 시조 홍무제는 요동과 동요하 지역에 대한 통치만을 시도했을 뿐, 합란부∙수달달등로에 대한 통치를 거의 포기했는데, 영락제에 이르러 이와 같은 기조는 변하게 된다. 몽골제국과 같은 세계제국 경영을 꿈꾼 영락제는 여진족을 ①건주여진, ②해서여진, ③야인여진으로 나누고, 이들에게 명나라 중심의 조공질서에 편입될 것을 요구했다. 대체로 영락 4년부터 정통 연간까지 명나라는 여진족 땅에 위소衛 384개를 설치하고(《대명회전》 125권 성황2 동북제이), 여진족 추장을 도독, 도지휘, 지휘, 천호, 백호, 진무 등으로 임명했다고 한다(《대명회전》 107권 조공3 동북이). 이때 조선의 영향권 아래 있던 오도리, 올접합, 올량합 등 부족들도 여진어로 쓰인 영락제의 칙유를 받았는데, 조선에서는 이 칙유 문제를 놓고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조선 《태종실록》 5권 영락1년 6월 25일자 기사). 재미있는 사실은 영락제의 여진족 경영은 영락 2년에서 15년 사이에 집중됐지만, 이후에도 여진족 위소가 꾸준히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이로 보건대 조공무역을 매개로 여진족을 지배하려는 명나라의 통치 방식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중에서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은 매년 명나라에 조공을 바쳐야 했는데, 《대명회전》에 따르면 이들의 조공품은 말, 초서피, 해동청, 토골, 아교, 바다사자 이빨 등 특산품이었다고 한다. 조공품의 품목에서도 눈치챌 수 있지만 이런 조공무역을 통한 여진족 지배방식은 요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왠지 요나라 이래 여진족을 지배하던 방식이 원나라, 명나라까지 이어진 느낌이 든다.
당연하지만 명나라는 자신들이 설치한 통치기구를 유지하기 위해 송화강과 아무르강 수로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는데, 영락제는 오늘날 지리시吉林市 일대에 조선소를 만들어, 요동의 군량을 아무르강 하류에 위치한 노아간도사까지 운반하도록 했다. 이 같은 수로를 이용한 둥베이 동북부 통치는 원나라의 합란부∙수달달등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원나라는 송화강과 아무르강 연안에 패고강, 알타연, 호리개, 도온, 탈알령 등 만호부를 두어 이 지역의 주민들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명나라 영락제 또한 기존 원나라의 세력권을 회복하고자 자신이 신뢰하는 내관 역실합을 노아간성까지 보내어 노아간도사를 설치한 다음 본격적인 여진 경영을 시작했다. 비록 명나라 선덕제는 해서여진의 반란(《선종실록》 58권 선덕4년 9월 3일자 기사)과 조선소 운영에 드는 비용 문제 때문에 1429년 노아간도사에 파견된 역실합 등에게 돌아오게 하고, 1430년 송화강의 조선소를 폐지했지만, 조선소 폐지 이후에도 역실합이 노아간도사에 가서 《영녕사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명나라는 여전히 이 일대의 수로를 이용해 야인여진을 통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체로 수렵 생활을 영유하다 보니 모직물 자체가 귀했는데, 역실합은 동류송화강-아무르강 인근지역의 위소에 모직물과 식량 등을 나누어 주어 이들의 환심을 샀는데, 이 같은 방법은 꾀나 효과적이었는지 여진족 추장 178인이 역실합을 따라 영락제에게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1412년).
물론 모든 여진족 부락이 수렵 위주의 경제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다. 해서여진 5부(엽혁, 소완, 오랍, 휘발, 합달)와 완안부, 오도리부 등 여진족은 농경문명을 영유했는데, 이들의 거주지를 보면 성채를 중심으로 농경, 목축생활을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동동부 산지에 살던 여진족들에게 있어 조공무역은 중국의 모직물과 사치품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일례로 《대명회전》에 따르면(《대명회전》 111권 급사2 외이상) 입경한 여진족 사절단에게 주는 회례품은 절초견, 절의채, 저사의, 화말 등 만주에서 얻을 수 없는 모직물이 대다수였으며, 이를 사절단 전원에게 주었기 때문에 여진족 입장에서는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명나라의 여진족 지배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①육로 운송체계 지역(건주여진, 해서여진)→조공무역
ⓐ건주여진→수렵, 약탈(완안부의 경우 농경 위주)
ⓑ해서여진→농경, 목축
②수로 운송체계 지역(야인여진)→순무巡撫 작업
ⓐ동류송화강-아무르강 유역→대체로 명나라 복속됨.
ⓑ두만강 유역→명나라와 조선에 양속됨.
대체로 건주여진, 해서여진 지역은 그래도 말이나 초서피, 해동청 같은 조공품을 바칠 수 있지만, 동류송화강-아무르강 지역은 그마저 생산되지 않는 지역이다 보니(이들이 조공품으로 바칠 수 있는 것은 물고기와 모피가 전부였다) 명나라에서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닌 이상, 조공무역조차 성립될 수 없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송화강-아무르강 수로운송체계 지역 주민들에게는 명나라에서 일방적으로 물품을 제공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당연 이 같은 관계를 정상적인 외교관계로 보기보다는 명나라 중심의 세계질서를 확립하고자 이들 부족에게 경제적 이익을 대가로 상하관계를 요구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전성기 명나라의 세력권은 맹삼 선생이 《청조전기》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아무르강 하류와 쿠릴열도에 이르렀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듯하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명나라 측 사료만을 보고 말한 것이지, 조선 측 사료를 보지는 않았다. 비록 명나라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올자(또는 울접합부)라고 부르며 모련위 등을 설치했지만, 이 지역의 여진족들은 조선의 6진 설치, 경진북정 등 대여진 공세로 인해 일부는 조선에 예속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들의 경우, 해서여진, 건주여진과는 달리 조선과 명나라에 양속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일대의 여진족들은 오도리부를 제외하고는 수렵 생활을 영유했기에 삶의 방식이나 생활패턴이 (여진족 중에서도 농경-도시생활을 영유하던) 해서여진과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일례로 해서여진의 경우, 부족장 자제들을 명나라로 보내어 유학을 배우게 한 기록이 종종 보이는데 이와 달리 두만강 유역의 여진 부락과 관련해 유사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조선과 주로 접촉한 여진족이 약탈을 일삼던 건주여진 또는 야인여진의 일종인 동해여진(올자)이다 보니, 조선에서는 건주여진, 동해여진 등 여진부락의 생활양식을 여진족의 생활양식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여진족을 수렵생활만 하던 산림 민족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이런 고정관념은 오늘날 한국 사학계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사료를 토대로 복원해보면 모든 여진족을 수렵민으로 보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 있는 가설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해서여진은 대부분 농경생활을 영유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의 여진족들은 이미 명나라 내지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개원도설》의 기록으로 보아 상당히 발전된 농경문명을 영유한 것으로 보인다.
상술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명나라 초기 여진족 지배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요∙금 시대에도 도시문명을 영유하던 송요평원 일대 사람들이 여전히 도시 중심의 농경생활을 영유했을 뿐만 아니라, 부족장 자제를 명나라 수도 북경에 유학 보낼 정도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영유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 같은 도시 건설은 화베이-타림분지 육상 무역로를 오늘날 지린시까지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둘째로 명나라는 송화강에서 시작해 오호츠크해까지 이르는 송화강-아무르강 수로운송체계를 이용해 둥베이 동북쪽과 연해주 일대에 사는 여진족을 복속 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명나라는 송화강-아무르강 수로 인근 거점들만 확보하다 보니 수로에서 벗어난 내륙지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송화강-아무르강 수로를 이용할 수 없는 두만강 유역의 경우, 명나라의 영향력이 사실상 미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조선이 이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할 때도 명나라는 조선과 여진족을 중재할 뿐, 실질적인 실력행사를 할 수 없었다.
애석한 점은 청나라 때 편찬된 《명사》에는 명나라의 여진 지배와 관련한 내용을 찾기 어렵다 보니 《명 실록》이나 《대명회전》, 그리고 당대 문인들의 기록을 토대로 유추해야 하는 영역이 많다. 불행 중 다행이도 조선 측 사료가 많이 남아있으니 이와 같은 사료들을 토대로 명나라와 여진족의 관계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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