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중화제국 체재 하에서는 정책결정권決策權과 행정권은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 비록 승상이 황제에게 정책 결정을 조언할 수 있었지만, 정책결정을 위한 별도 권력 기구를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무제 시기에 이르러 문학시종文學侍從 집단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들은 황제의 정책 결정을 도울 뿐만 아니라, 필요시 지방관 또는 외국 사신으로 파견되어 황제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시간이 흘러 동한 광무제에 이르러 상서대尚書臺(일종의 비서실로 이해하면 된다)가 이와 같은 역할을 했지만, 이들이 점차 행정권까지 독점하게 되자, 중화제국의 황제들은 이제 상서성을 견제해기 위해 새로운 권력체제를 구상해야만 했다.
이때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삼성육부제三省六部制다. 상서성과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는 선학들이 이미 연구한 고로, 여기서는 삼성육부제 하에서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정책을 결정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①중서성이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여 조령詔令(오늘날로 치면 행정령과 비슷하다 볼 수 있다) 초안을 작성한 다음 문하성에 보낸다.
②문하성에서는 조령의 내용을 심의∙검토하며, 총 3차례 거절할 수 있다.
③문하성의 의견을 받아들여 수정된 조령은 상서성에 하달된다.
④상서성은 이를 육부六部(예부, 이부, 호부, 병부, 형부, 공부)에 보내고, 육부는 이를 구사九寺(태상, 광록훈, 위위, 태복, 정위, 홍록, 종정, 사농, 소부)에 보내어 실질적인 업무 처리를 맡긴다.
이처럼 삼성육부제 하에서는 비록 황제라 할지라도 문하성에서 반대하는 조령을 반포할 수 없는구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하성 또한 조령을 심의∙검토하는 권한만 있을 뿐, 조령 초안을 작성할 수 없다 보니 이들도 절대 권력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제안권, 심의권, 행정권을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에게 나누어 서로 견제하게끔 만드는 것이 제도를 처음 설계했을 당시의 취지였지만, 당나라 때 이르러 이와 같은 권력구도는 변하게 된다. 당나라 때는 상서성의 수장인 상서령 직책을 공석으로 놔두고, 중서성과 문하성의 재상들이 조령 초안을 만들기에 앞서 한데 모여 조령 내용을 조율했는데, 이 같은 모임을 가리켜 중서문하中書門下라고 한다. 이후 중국의 권력 구조는 아래와 같이 바뀌었다.
①중서문하에서 재상들의 조율을 거친 정책만 상서성에 보내진다(사실상의 집단합의제集體合議制).
②비록 상서복야가 재상으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정치적 기능과 위상을 고려했을 때, 상서성은 이미 중서문하의 하위 기구로 전략했다(행정권).
③육부에서 정한 업무분담 계획에 따라 구사에 구체적인 지시가 하달된다.
이와 같은 중국식 권력 이원분화 구조는 원나라에 의해 깨지게 되는데, 원나라 때는 중서성에서 육부를 총괄하면서 정책결정권과 행정권이 다시금 중서성에 집중됐다. 하지만 당나라 때 확립된 정책결정권-행정권의 이원분화적 정치구조는 명 태조 주원장의 친위 쿠데타로 인해 부활하는데, 비록 호유용의 모반 사건을 빌미로 권력이 집중된 중서성을 공중 분해시켰지만, 결국 제국의 업무를 본인 스스로 처리할 수 없음을 깨닫자 전각대학사로 하여금 본인의 정책 결정을 돕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영락제에 의해 상설기구로 변모하면서 내각(7인으로 구성)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비록 이들에게 공식적인 정책결정권은 없지만, 황제의 정치적 판단에 영향을 준다는 것 하나만 놓고 보면 사실상 권력기구나 다를 바 없었다. 이로서 집단합의제 성격을 띈 정책결정기구는 내각의 탄생과 함께 부활하게 된다.
청나라 중엽에 이르러 이 같은 정책결정기구 역할을 맡은 내각의 기능은 군기처軍機處로 이관되는데, 대체로 6인의 군기대신과 16-32명의 군기장경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권력기구 또한 정책결정기구 역할을 맡았다. 여기서 우리는 행정부 기능을 맡게 된 내각 대신들이 군기장경을 겸직하는 방식으로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면 행정부 관료들이 정책결정기구에 참여하는 방식은 난징국민정부, 나아가 오늘날 중국에서도 보이는 주요 정치체제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군기처에서 유사한 현상이 발견된다는 사실이 실로 흥미롭다).
정책결의기구의 집단합의제 성격은 중화민국 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난징국민정부를 예로 들어보자. 비록 소련식 정치시스템을 벤치마킹했지만, 국민당은 이를 중국 실정에 맞는 방향으로 바꾸어 집단합의제 성격을 가진 권력기구가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으로 정부조직을 설계했다. 일례로 《국민정부조직법 (1928년 수정법안)》에 따르면 난징국민정부는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의 지도를 받으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추천한 5-7인을 국민정부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한 다음, 상무위원 가운데 1인을 주석으로 선출하게끔 되어있다. 이 주석직은 난징국민정부 실세였던 장제스가 오랫동안 역임했는데(1928-1931, 1943-1948), 《조직법》에 따르면 위원회 주석과 상무위원 2인 이상의 서명만 있어도 국민정부 명의로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기에, 장제스 입장에서 보면 어렵지 않게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구조였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비록 《조직법》에 따라 국민정부위원회는 행정기구를 총괄하는 행정원을 두었으며(장제스 또한 1930-1931년, 1935-1938년 행정원장을 역임했다), 내무, 외교, 재무, 교통, 사법, 농, 광, 공, 상 등 부처를 총괄하도록 했지만, 국민정부위원회 위원들이 주요 행정부처 장관을 겸임하다 보니, 사실상 권력이 국민정부위원회 상임위원들에게 집중된 구조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중앙위원회에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구조를 깨고자 《중화민국헌법》 초안 작성을 주도한 장쥔마이張君勱는 행정원장을 행정기구 수장으로 삼고, 행정원이 의회에 직접 책임지도록 설계함으로써 총통 권력을 견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타이완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총통과 행정원장의 행정부 수반 논쟁만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당시에도 장제스의 수정요구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총통 권력을 견제한다는 구상도 실현될 수 없었다. 하지만 난징국민정부의 《국민정부조직법 수정안》과 《중화민국헌법》은 중국공산당 정권의 정치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권력기구, 행정부처의 명칭만 달라졌을 뿐 실상 기능적인 측면에서 난징국민정부의 구조적 특징을 계승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조직도를 참조하라.
이를 통해 우리는 난징국민정부의 권력구조가 현 중국의 권력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세 가지만 살펴보자.
①소련에서는 중앙위원회 서기국이 사실상의 최고권력 기구인데 반해,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서기처書記處의 기능이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중국에서 서기처가 최고위층만이 들어갈 수 있는 요직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상무위원 중 두어 명이 서기직을 겸하지만), 이는 이 정치인이 총서기의 최측근임을 나타낼 뿐 국가 최고위급 지도자라는 뜻은 아니다. 하물며 중국공산당이 원래 당주석이 있었음을 생각하면(총서기 자체가 덩샤오핑이 마오의 후계자였던 화궈펑華國鋒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권력 분화 작업의 일환이었음을 생각해보자) 중국공산당 최고위층 조직체계는 국민당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 같다. 이와 같은 요인 때문에 중국에서 공산당 서기는 대체로 총서기의 최측근들이 들어가는 자리지만 이들이 반드시 정치국 상무위원을 겸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시진핑 4세대 지도부 체제 하에서 류허 국무원 부총리(미중 무역협상 당시 중국 측 대표가 맞다)는 중국공산당 서기직을 겸하고 있지만, 그 또한 정치국 상임위원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지 본인이 최고위급 지도자는 아니다. 따라서 정치국 상무위원을 두고 이들의 합의를 통해 국가운영을 하는 구조는 소련에서 뿌리를 찾기보다는 난징국민정부 시기 국민정부위원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권력은 소련 서기장과 같은 절대적인 권한을 지닌 최고권력자라고 볼 수 없다. 소련처럼 서기처가 장관회의를 지휘하는 것도 아니요, 당 내부에서 가장 힘있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나머지 정치국 상무위원의 견제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제도적 한계 때문에 중국 최고지도자는 반드시 국가주석직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겸해야 하는데, 이는 중국 실정이 소련처럼 권력이 서기장에게 집중된 것이 아닌 정치국 상무위원들에게 집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이 시진핑 주석을 총서기라 불렀을 때 나는 폼페이오가 중국 정치시스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국가주석직을 강조하는데 이유가 있다). 비록 덩샤오핑이 총서기직을 부활시키기는 했지만, 이는 중국공산당 내부 업무만을 처리할 뿐, 총서기직 하나가지고 국가 정책을 지휘하는 것은 현 중국 정치제도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간단한 예를 들자면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서기처의 결정을 번복하면 된다). 이런 구조 하에서는 당주석직이 있어야 비로소 최고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데, 덩샤오핑의 정치개혁 목적 자체가 마오와 같은 최고권력자의 탄생을 막는데 있다 보니, 총서기직 하나만으로 중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최고권력자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나는 폼페이오가 중국 총서기를 소련의 총서기 또는 제1 서기와 같이 모든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직책이라 오해하고, 이 때문에 시진핑을 총서기라 칭한 것 아닌지 추측해본다(그리고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왜 시진핑 주석이 당주석직을 부활하려 한다는 소문이 도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②국무원 총리가 최고지도부인 상무위원을 겸한다.
소련 장관회의 주석에 비교되는 국무원 총리는 기능 면에서 국민정부 시기 행정원 원장과 유사한데, 국무원 총리가 최고위층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방식조차 난징국민정부와 똑같다. 소련과 같이 국무원 총리는 전인대에서 선출되지만, 막상 총리가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방식은 난징국민정부 시절 행정원장 직을 국가위원회 위원들이 겸임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총리는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서 선출되며, 그는 총리직을 유지하는 동안 상무위원 직을 겸하게 되어있다. 이 때문에 중국 국무원은 서기국의 지시를 받는 장관회의와는 사뭇 다르다. 일단 총리 본인이 최고위층 권력자일 뿐만 아니라, 부총리 급 인사들이 대체로 당의 요직인 서기 등을 겸직하고 있다 보니, 행정부 수반이 최고위층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닌 재상의 직분을 겸직해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③집단합의제 성격의 정책결정기구에 국가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난징국민정부와 오늘날 중국 정치제도의 특징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래와 같은 특징을 주목하고 싶다.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권력기구와 행정부가 이원화된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집단합의제 성격의 최고권력기구가 국가 정책을 결정한다.
ⓒ행정부 수반은 최고위직을 겸한 상태에서 정책결정에 참여하며 결정 사항을 행정부에 지시한다.
이는 서기장에서 권력이 집중된 소련과는 확실히 다른 권력구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당내에서 서기국의 권력을 제어할 장치가 없던 소련에서는 서기장이 실질적인 최고권력자가 될 수 있었지만, 서기국이 정치국 상무위원의 지시를 받는 중국에서는 총서기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지 않다 보니, 정치국 상무위원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기에 더해 총서기의 최측근인 당서기 전원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수 없다 보니, 사실상 총서기가 국가주석직을 겸하지 않으면 통치가 불가능한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진핑의 권력 장악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생각보다 “민주적인” 방법-그는 당내 차기 지도자 선거에서 최다 득표자였다-으로 국가주석에 오른) 그는 반부패를 기치로 당내 고위직을 겸하고 있는 다른 계파 지도자들을 물러나게 한 다음, 본인 측근들로 정치국 위원 수를 채웠다. 여기에 더해 시진핑은 기존 당내 계파에 속하지 않은 ⓐ비공산당원, ⓑ여성, ⓒ(중국정부에 협조적인) 소수민족을 대거 등용했는데, 기존 정치구도 속에서 고위층에 진입하는 것조차 어려운 이들이 요직에 오르게 됐으니, 당연 시진핑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밖에 없다. 이 결과 정치국 내부 토론과 표결에서 시진핑은 본인 계파가 다수라는 점을 이용해 자신의 뜻대로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시진핑을 정치적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던(그리고 당내 지지기반이 확실한) 리커창 총리마저 2015년 금융위기 대처 실패로 인해 권력이 약화되자, 오늘날 중국 최고위층 정책결정기구에서 시진핑을 제어할 정치적 장치는 사라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정치국 내부 표결에서 어차피 시진핑 계파가 다수파다). 아울러 청나라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진핑 또한 본인 직속 위원회를 여러 개 만들었는데, 이런 위원회는 정치제도 개혁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행정부 권력을 가져오는 역할을 맡았으며, 과거 후원신정胡溫新政 당시 학자들이 외친 여러 정치개혁 구호들은 시진핑의 전제정치를 강화하는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시진핑의 전제정치는 단순히 정적 숙청만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집단합의제 성격을 띈 최고권력기구에서 자기 계파가 과반 이상을 차지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에 지도자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전제정치와는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상술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중국의 정치체제가 당나라 때 중서문하가 만들어진 이래, 일정한 연속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난징국민정부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한데, 이들은 ①소련식 민주집중제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②이와 같은 소련식 제도를 중국의 실정에 맞게 개편함으로써 집단합의제 성격을 띈 근대적 최고권력기구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이 같은 정치체제는 중국공산당에게 그대로 답습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데, 이런 집단합의제는 권력의 독식을 막는데 유리하지만, 특정 계파가 최고권력기구의 다수파가 될 경우, 이들을 제어할 정치적 장치가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시진핑은 이와 같은 정치제도적 한계를 역이용해 반대파를 숙청한 다음, 자기 계파 사람들을 최고권력기구에 끌어들여 다수파가 되는데 성공한 것이다.
국민정부의 영향은 이외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국가주석이 사실상의 명예직이나 다를 바 없고(총서기가 국가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겸직할 때 비로소 최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 국무원이 의회나 다를 바 없는 전인대에 책임지는 형태의 권력구조는 소련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장쥔마이가 주도한 《중화민국헌법 초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오늘날 중국의 정치체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난징국민정부 시기 정부조직 구성은 중요하며, 오늘날 중국 정치체제의 직접적인 뿌리나 다를 바 없다. 난징국민정부라는 과도기적 성격의 정부조직이 존재함으로써 전근대적 재상합의제는 집단지도체제로 변모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정책결정권과 행정권의 이원분화 구조가 완성될 수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의 정치제도를 막연히 소련의 일원적 영향을 받았다고 단언하거나 중화민국 시대 정치제도가 오늘날 중국에 미치는 영향을 배제할 경우, 우리는 소련과 중국의 구조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들을 막연히 소련과 같은 서기장에게 권력이 집중된 전제주의 국가로 오해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는 전근대적 재상합의제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집단합의제로 변모했는지는 연구해야 하며, 이와 같은 제도적 연속성이 중국에서 유지되는 정치적∙경제적 이유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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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補論
중국의 정책결정-행정 이원분화二元分化적 정치체계는 또 다른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는데, 바로 율령제를 연상케 하는 현행 법률체계다. 대체로 중국에서 법안이 통과되려면 다른 정파와의 협상을 거친 뒤에 전인대에서 표결을 거쳐 법적 효력을 지니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을 거치다 보면 일년을 훌쩍 넘기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여러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법안 통과가 지연될 경우 적시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되는데,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국가주석령, 국무원령과 같은 행정명령을 통해 중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행정명령은 별도의 합의과정 없이도 실행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법률과 똑같은 법적 효력을 지니다 보니 중국 지도부는 행정명령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현재 중국에서 법적 효력을 지닌 법률은 270여부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 반포된 국가주석령은 90여개, 국무원령은 740개에 이른다. 이 같은 정치제도 하에서 당연 법치는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으며, 국가주석령, 국무원령이 다루는 범위도 단순한 정부 운영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는 별도 법률을 만들어서 다루는) 사회적 문제까지도 다루게 된다.
이처럼 행정명령이 정부 운영을 넘어 국가 통치 기능까지 가지게 되자, 국가주석령과 국무원령 등 행정법령이 법률체계의 상층구조를 형성하게 되고(법률에 대한 해석권을 독점하고 있는 공산당 지도부가 반포하는 명령이니 이 같은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인 법률은 율격律格과 같이 하층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이 같은 법률체계 하에서 사람들은 통상적인 의미의 법률뿐만 아니라 법률과 관련된 행정명령까지 숙지해야만 하며, 사법부 독립이라는 근대국가체계의 대원칙은 국가주석령과 국무원령 등 행정명령에 의해 파괴되게 된다. 심지어 2020년 5월 《민법전》이 정식으로 반포되기 이전까지 중국은 체계적인 민법조차 없던 나라임을 생각하면, 중국사회에서 국가주석령, 국무원령 등은 단순한 행정명령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중국사회의 특징들을 살펴보게 되면 우리는 중국이 얼마나 우리와는 다른 근대화 과정을 거쳤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당나라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통치철학과 권력구조는 근본적 변화를 경험해 본적이 없다. 여전히 중서문하를 연상케 하는 집단지도부가 권력을 독점하며, 율령제를 연상케 하는 법률체계에 기초해 나라를 다스리고, 대다수 사람들은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기록된 당나라 때 도시민들처럼 질서 있는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이질적인 중국인들의 모습을 직면할 때마다, 이와 같은 차이의 역사적 연원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막연히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런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서구 민주주의 제도를 영혼까지 받아들인 우리와 달리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을 방식을 유지할 뿐이다.
수 차례 전쟁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은 중국을 대통령제나 의회제 또는 민주집중제 국가로 만드는데 실패했다. 더 정확히 말해 중국인들은 서구세계의 정치, 사회적 제도조차 중국화시켜 버렸으며, 자신들이 익히 알던 방식대로 서구적인 제도를 바꾸어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중국의 이질적인 국가체제는 역사책에서나 보던 것이다 보니 우리로서는 생소할 수밖에 없고, 대다수 연구자들로 하여금 중국 정치∙사회 제도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포기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 요인에 대한 이해 없이 오늘날 중국을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나조차 이런 실험적인 글쓰기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여러 사람들이 중국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희망을 담아 이 글을 끝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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