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알렉사메노스 낙서》와 데미언 허스트의 《오로지 신만이 아신다》에 대하여

계연춘추 2021. 4. 27. 21:21

좌: 데미언 허스트 《God alone knows》 -출처: www.damienhirst.com/god-alone-knows

God Alone Knows - Damien Hirst

www.damienhirst.com:443

우: 《알렉사메노스 낙서(Alexamenos graffito)》 -출처: en.wikipedia.org

현존하는 십자가를 묘사한 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알렉사메노스 낙서(Alexamenos graffito)》다.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이 낙서에는 알렉사메노스라는 인물이 십자가에 매달린 말 또는 당나귀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의 신에게 경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체로 이 낙서가 그려진 시기가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예전보다 자유로운, 그러나 하드리아누스 시대 그리스도교 핍박에 의해 여전히 이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좋지 못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려진 낙서로 생각된다. 낙서를 그린 이는 알렉사메노스라는 그리스도교도의 멸시하는 듯한 태도로 그가 사람도 아닌 반인반수의 괴물에게 기도함을 비웃고자 이 낙서를 그렸다. 

나는 《알렉사메노스 낙서》를 보면서 플라톤 《파이드로스》의 내용을 떠올렸다. 인간의 애욕과 무절제를 다룬 이 글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인간의 영혼이 흡사 날개 달린 말이 끄는 쌍두마차와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두 마리 말 가운데 한 마리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절제와 수치를 알지만, 다른 한 마리는 못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귀머거리요, 욕망에 충실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무절제한 말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흥분하는데, 마차를 끄는 기수와 절제를 아는 말은 욕망에 충실한 말의 행동을 막을 수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저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절제한 영혼에 빗대어 희롱하고자 그린 그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당대 그리스어 문화권에 속한 이들이 보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은 허황되고 비이성적인 종교만을 고집하는 자들이었으며, 심지어 그들이 믿는 신은 완전한 신성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신이면서 인간인 어떤 상태라고 주장했다. 어쩌면 저 낙서를 그린 이는 그리스도교의 이와 같은 신관을 비웃고자 저 반인인수의 괴물의 머리를 영혼을 상징하는 말 머리로 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혹자는 당대 로마인들의 기록을 근거로 저 낙서의 머리가 당나귀라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솝우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어 생활권에서 어리석고 우둔한 자를 고집 쌘 당나귀로 묘사하는 경우는 흔하다(아울러 프리아포스가 당나귀와 남근 길이를 비교했다는 신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당나귀를 성욕과 연관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소크라테스의 마차 비유에 등장하는 고집 쌘 말 자체가 당나귀를 모티브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알렉사메노스 낙서》에 그려진 반인반수의 경우, 당나귀라 하기에는 귀를 너무도 작게 그렸다.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본다.

저 반인반수의 머리를 말 머리라 하든 당나귀 머리라 하든 어차피 저 괴수가 상징하는 뜻은 딱히 변할 것 같지는 않다. 신도 인간도 아닌 어떤 상태의 생명체가 십자가에 매달려 땅을 바라보고 있으며, 십자가 아래 있는 알렉사메노스는 그를 응시하며 기도하고 있다. 신들에게 제사 지낼 때 사용되는 희생 재물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알렉사메노스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관계만이 나타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비록 그리스도교를 비웃고자 그린 낙서지만, 《알렉사메노스 낙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영혼임과 동시에 인간이신 어떤 존재를 믿는 자들이다. 비록 초대 그리스도교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영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적 존재라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의 합일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듯이, 우리의 신앙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실존자로써 아我와의 관계성만을 다룰 뿐이다. 예수와 아我 사이에는 아무런 중재자도 대언자도 희생 제물도 없다. 오로지 아我만이 신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그간 얼마나 이단적인 가르침을 전했는지 알 수 있다. 종교 지도자가 강단에서 신의 대언자를 참칭하며, 그의 영적 권능은 마치 신에게서 받은 것처럼 선포할 때, 그를 정점으로 종교 공동체 내부에서는 피라미드 조직이 만들어지고, 봉사 강도와 사회적 명망에 따라 신분과 위계가 결정된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종교 공동체 내에서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쳤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이 낙서에 그려진 것처럼 신앙은 애초에 예수와 아我와의 관계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눈을 돌려 데미언 허스트의 《God alone knows》를 살펴보자. 나는 이 작품 명칭의 번역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누구도 모른다” 식으로 번역하던데, 그보다는 “오로지 신만이 아신다”로 번역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데미언 허스트는 당나귀와 말 대신 양을 오브제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양이 뜻하는 바는 《알렉사메노스 낙서》에서 반인반수가 뜻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대교 문화에서 어린 양은 메시아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고집 쌔고 귀머거리라는 점에 있어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말이 뜻하는 바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를 숭배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일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그리스도교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신을 숭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데미언 허스트는 죽은 양을 십자가에 매달아 포름알데히드가 가득 차 있는 유리통에 집어넣고 관객들에게 첫번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그리고 데미언 허스트에게서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 순간, 우리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대다수 신도들은 표상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데미언 허스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표상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표상 너머에 있는 그 무엇과 아我와의 관계다.”

반대로 표상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내 삶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 

이어 데미언 허스트는 두번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당신은 스스로와 신과의 관계에 충실한가?”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신론神論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플라톤의 초기작 중 하나인 《애우티프론》에서 그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리스인들이 믿는 신들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고 비도덕적인지에 대해 설명하며, 사실상 이들이 진실된 신이 아님을 고발하고 있다. 그럼 진실된 신은 어디 계시는가? 이와 같은 그리스인들의 질문에 세속화된 플라톤주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선善의 결합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내세워 “당신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완벽한 신께서 여기 계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래 완전한 선善적 속성을 가진 신에 대한 탐구야말로 인간 가운데 선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로마서》에서 우리의 양지良知를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간 종교를 하나의 표상에 대한 존경심 내지는 경외심으로만 바라보려 했을 뿐, 표상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는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제례의식과 표상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행위들에 치중했으며, 마치 이런 (타인에게 보여지는) 행위들을 통해 스스로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우리에게 종교의 본질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 수많은 관객들 사이에서 양두羊頭를 응시하는 순간, 이 작품은 미완의 상태를 벗어나 나와 십자가에 매달린 양관의 관계성을 만듫으로써 완성된다. 이 작품에 몰입되어 있는 아我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我와 표상 너머에 있는 그 무엇과의 관계성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통해 데미언 허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해 고민해보자. 그간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한다 말하면서 얼마나 표상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해 고민하였는가? 어쩌면 우리는 표상 자체에 몰두한 나머지 표상 너머에 있는 진정한 신적 본체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표상을 떠받들고 숭배하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선함을 나타내는데 집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성서》는 이런 표상에 집중하는 종교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우상숭배”

이제 우리는 사회적 소음에서 벗어나 내면에서 올라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타인과 이어진 사회적 관계성이 없어지고 오로지 신과 나만이 남은 세상에서 나는 무엇인가? 특정 종교 신앙이 추구하는 선한 삶을 살아가며, 이 종교에서 가르치는 가치관을 내 인생의 가치관으로 삼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회적 관계성을 위해 특정 종교를 수단으로 스스로의 선함을 나타내고, 나아가 이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 했던 추악한 마두馬頭 인간일 뿐인가? 우리의 종교적 행위는 진정으로 신을 향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실로 데미언 허스트가 이 작품에 붙인 이름과도 같다.

“오로지 신만이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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