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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한 역사적 고찰

계연춘추 2021. 4. 6. 11:01

2천 년전, 예수라는 유대인이 로마당국에 의해 십자가에서 사형당했다. 그리고 그는 케리그마에서-이를 어찌 받아들이는지는 각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부활하셨다. 오늘날 그는 종교 사회주의에서 파시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신앙적 그리스도로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의 처지가 모두 같다 할 수 있을까? 저 북녘 땅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믿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대형 교회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자 구호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한다. 도대체 예수는 누구인가? 한국 보수교회가 불러온 예수라는 홍수가 한국을 덮친 오늘, 정작 예수를 찾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에 플라톤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로고스란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형상이요, 만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존재이자 천사보다 우월한 존재였다. 그렇다면 로고스는 어느 때부터 존재하였는가? 필로는 로고스가 창조의 도구이자 만물은 이 로고스가 부여됨으로써 질서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로고스란 선-존재, 달리 말하자면 생명의 원천이자 모든 지혜의 근원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지상 최고의 미덕이란 바로 로고스에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따라서 필로에 의해 하느님의 말씀인 로고스는 목자로서 하느님의 아들이자 그의 대리인으로서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이들을 이끄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믿었다.

필로의 이와 같은 주장은 그 당시 유대교 내부의 보수적인 담론의 반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진보적인 힐레파 그리고 신생 종교였던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중에서도 신생 종교였던 그리스도교는 마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해석해야 할 이론적 골격이 필요했으며, 그들에게 있어 필로와 플라톤의 담론은 새로운 종교의 골격으로써 사용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70~90년 사이에 쓰여진 《요한복음》과 《히브리서》에는 이미 플라톤의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의 그림자를 연상케 하는 문구가 등장하며, 무엇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쓰인 것으로 보이는 《요한복음》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플라톤주의 시대를 여는 선언이나 다를 바 없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필로의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기초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관계를 자신들의 신학적 틀로서 설명하려 했다. 이로서 세 위격이 완전한 하느님이지만, 그럼에도 진리로서 동일한 본체와 본질을 영유한다는 믿음이 그리스도교에서 생겨났으며, 무엇보다 《요한복음》을 기점으로 키릴루스에 이르기까지의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주도했다는 사실에 주의 기울일 필요가 있다.

로마제국의 여타 지역과는 달리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노시스파와 신 플라톤주의라는 강력한-그리고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세력이 있었으며,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들과의 논쟁 및 대결을 통해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조차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여야만 했는데, 이와 같은 환경은 분명히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 테살로니키, 에페소스 등 타 지역의 교회와는 구분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노시스파, 그중에서도 가장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발렌티누스파와의 숙명적인 대결을 펼쳐야만 했다.

오늘날에도 발렌티누스파는 다른 그노시스파와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사도 바울로의 제자 테오다스에게서 그리스도교를 배웠으며, 그의 주장에서 우리는 바울로의 그림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교자 유스티누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발렌티누스파의 도전에 대응해야만 했으며, 무엇보다 발렌티누스가 사도 바울로의 신학을 발전시킨 삼위일체, 즉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3가지 다른 위격과 영적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주장을 반박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아리우스는 삼위일체가 발렌티누스의 이단적인 학설이기에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으며, 마르켈루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삼위일체를 처음으로 제창한 이가 발렌티누스라는 것에 이견을 제기하는 학자는 찾기 쉽지 않다.

발렌티누스파는 사도 바울로의 신학이 극단적으로 발전할 경우, 어떤 상황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신학적인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사도 바울로 신학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앞서 유대교 내부에서도 진보적인 힐레파의 수장 가말리엘1세의 제자임과 동시에 그 자신도 힐레파의 구성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정체성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시종일관 자신을 바라사이인, 그 중에서도 힐레파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회심의 이면에는 힐레파로서의 정체성과 예루살렘에 들어온 직후, 사두가이파, 삼마아파 등 보수적인 분파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있었을 것이며, 그와 같은 갈등은 어떤 계기에서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바울로는 어떤 계기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선택하였으며, 진보적이고 헬레니즘에 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를 건설하려고 했다. 예컨대 진보적이지만 민주당을 지지했던 사람이 어떤 개기에서 민주당이 아닌 정의당을 지지한 것과 비슷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로의 신학은 시종일관적으로 그리스인들을 위해 쓰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 신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었으며, 유대교의 나사렛 이단에 불과하였던 그리스도교를 헬레니즘 세계의 종교로서 탈바꿈한 첫 번째 시도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로 서신에서 당시 그리스 철학자, 문인들의 그림자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그가 당시 유대교와의 충돌보다는 그리스인들의 종교에 보다 비판적이었던 것에서 그의 포교 전략이 유대인보다는 그리스인에 포커스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바울로 신학의 포교 방법은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인 발렌티누스에 의해 극단적인 방향까지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교의 가장 강력한 적은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에 치중한 사도 바울로 문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들의 위험은 그리스도교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발렌티누스의 학설을 모두 이단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려움 점들이 있는데, 이는 그의 학설이 실상은 사도 바울로와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가 결합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여성들에 대하여 당시 정통적인 교회에서 남성의 권위만을 인정한 것과는 다르게 발렌티누스는 여성 또한 교회의 설교자와 교사로서 일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여성에 대한 남다른 배려를 가졌던 사로 바울로, 더 나아가서 당시 이혼 문제에 있어 여성의 처지를 어느 정도 배려하였던 힐레파의 주장과 이어진다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부들에게는 발렌티누스의 학설에서 플로티누스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바울로에게서 비롯된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요구되었다.

물론 발렌티누스주의가 사도 바울로와 추구하는 방향은 일치하였으나, 그의 충실한 계승자였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이는 그가 플로티누스의 영향을 바울로 못지않게 받았들였기 때문이다. 한 예로 그는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의 영향을 받아 세 분류의 사람들-Pneumatics와 Psychics, Hylics로 나누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플로티누스는 진리이자 빛인 日子가 있는데 이 일자에서부터 빛이 흘러나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일자에서 멀어질수록 물질계에 가까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로서 일자와 물질계, 즉 플레로마와 케노마는 서로 대립한다고 보았다. (《골로세서》와 같은 사도 바울로의 서신에서도 플레로마라는 단어가 보이는데 이를 근거로 혹자들은 사도 바울로 서신이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발렌티누스 또한 플레로마와 케노마의 이원세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근거로 세 분류의 사람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들의 분류는 일자에서 유출되는 빛을 많이 받고 적게 받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에 기반한 발렌티누스의 주장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에게 대항하였다.

예로 들자면 플로티누스는 일자의 세계-플레로마와 물질계인 케노마가 대립한다고 보았으며, 그 와중에서도 하느님과 피조물은 본질적인 차이보다는 일자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졌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교부들은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그것은 일자에서 유출되는 빛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럼 하느님은 누구인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선-존재라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 선-존재인 하느님에게서 영과 물질이 동시에 창조되었으며, 이로써 질서의 창조자인 하느님의 은혜 없이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다수의 한국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에서 어떤 이들은 물질은 인간의 영적 생활을 속박하기에 물질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치지만, 이는 그노시스주의의 가르침이 아닌가? 또한 사탄이 하느님과 대립한다고 보며, 모든 유혹과 죄는 사탄에게서 비롯된다는 잘못된 가르침은 많은 이들을 광신과 광란의 장으로 몰아버리고 있다. 한국 교회가 이단을 다산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한국 교회 그 자체에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 수 있다. 죄는 무엇인가? 우리는 죄가 하느님과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 보았지만 만일 플레로마와 케노마의 이원적 대립이 없고, 하느님은 선-존재라 한다면 죄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대 아타나시우스가 죄에 대한 논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선-존재인 하느님과 인간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나, 물질과 영은 동시에 창조된 것이며 선하다고 선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죄도 본질적으로는 어떤 선에 대한 추구라는 것이라고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대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은 본래 이성적인 사변을 통해 그 생각과 활동이 하느님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점차 오감적인 善, 또는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인간의 선을 추구하는 본능은 점차 육체적인 쾌락의 선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이 선을 추구하는 본성은 같으나 그 선함을 추구하는 본성의 방향이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육체적인 선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인간은 이성적인 선함보다는 오감의 느낌을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하는 선이 이성과 진리,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그 순간,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선악과란 그와 같은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추구하는 종교인가? 그것은 인간의 이성적인 사변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철학과 그리스도교는 힘을 합하여 그리스인들의 황당무계한 제우스 숭배-그들의 고유 종교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선과 악을 이분법이 아닌 힘의 방향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도 발견된다. 한 예로 헤라클레이토스는 활의 이름이 생명이면서 죽음이라 말한 바 있는데, 이는 활의 본질에 의해서 활의 성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활의 사용처의 다름에 의해서 그 이름(즉 본질)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공교롭게도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 그의 언급에 따르자면 로고스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자 선-존재라 말하였는데 이는 플라톤, 더 나아가서 필로와 그리스도교의 로고스론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인간은 항상 선한 것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문제는 올바른 선함을 찾지 못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노시스파의 주장대로 인간이 일자에서 멀어져 물질계의 환영에 구속되었기에 신비한 지식을 얻음으로써 신적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만일 이를 인정할 경우,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만 이는 전통적인 가르침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 하지만 이는 회화의 시뮬라크르와 그 본질은 다르다. 한 예로 우리는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에 그린 파이프를 결단코 파이프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파이프의 이미지일 뿐이다. 이와 같이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 한들, 하느님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인간이 신적인 성질을 애초부터 가지지 않았다. 인간은 오로지 생각과 사고의 방향을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발걸음이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여기에서 그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인간이 마땅히 할 바를 알려주었다. 혹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이 인간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은 보편적으로 사자에게 영혼이 있으며, 그 영혼의 옳고 그름에 따라 사후의 고통을 받는다고 믿었다. 문제는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인가”야말로 당시 가장 큰 화젯거리였다. 힐레파와 보수적인 유대인들 사이에서의 충돌이 지속된 것도 생각해 보면 옳은 삶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혁명을 외치지 않았다. 하지만 올바른 삶을 추구하고 갈구하던 이들에게는 그는 이미 혁명이었다. 그는 하느님 나라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임하고 있다고 선언하였으며, 인간 세계의 가치관을 부정하였다. 강한 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닌 약한 자들이 위로 받는 세상, 가난한 이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정의가 승리하는 세상을 노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자신의 삶으로 인간의 올바름이란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며, 그가 죽을 때 하느님은 더 이상 사제계급의 전유물이 아닌 온누리에게 정의와 희망을 약속하는 무지개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성적인 사변과 판단을 인문주의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인문주의를 사탄과 동일시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성서》는 이성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만일 교부들이 한국 목사들의 이와 같은 설교를 들었다면 이단 그노시스파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인간의 사변과 이성은 인간이 진리로 향하게 하는 도구이자 믿음의 시발점이다. 삼위일체 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론에서 발렌티누스주의에 대한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비판에 이르기까지의 형성 과정을 거쳤으며, 그것은 어떤 목사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이성적인 사변과 신앙이 결합하면서 신의 본질을 탐구한 결정체다. 다만 발렌티누스는 삼위의 다름을 강조하였다면, 교부들은 그 본질의 일치성을 보다 강조하였지만. 만일에 삼위일체가 신비한 것이고 이성적인 풀이가 불가하다면 《성서》의 그 무엇이 우리에게 정확하고 확실한 언어로써 다가오겠는가? 이는 그노시스파의 이단 주장이 아닌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는 이들의 신학적 견해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는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노시스파와의 대결에서 교부들은 《성서》가 정확하고 온전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믿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문헌의 출처가 분명한 책들을 가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정경과 외경, 위경이라는 《성서》에 대한 삼분법이 등장한다. 그러나 스피노자 등이 제시한 일부 《성서》의 위작 문제는 18세기 대륙신학에서 큰 화두로 떠올랐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당시 청년 튀빙겐학파는 교부들이 가르친 바와 같이 《성서》의 신화적이고, 믿을 수 없는 요소들을 제거할 경우, 더욱 많은 이들이 《성서》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신약성서》를 중심으로 《성서》의 믿을 수 없는 요소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같은 노력은 슈트라우스의 《예수전》이라는 결실을 맺게된다.

그러나 《성서》는 반드시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하며, 또 그와 같은 합리적인 해석만이 《성서》의 원형이라 생각한 것은 좋았으나, 그 합리적인 영역이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시대에 선지자가 환자를 치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황당무계한 일로 들리기 때문이다. 실상 이와 같은 작업의 결론은 슈트라우스의 말년의 전향-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무신론적 성향으로 전향하였다-으로만 보아도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사도 이래 합리적이고 뜻이 분명한 《성서》에 대한 환상은 깨졌으며, 이에 하르나크는 《성서》에 등장하는 “과학적이지 못한” 기적을 모두 배제한 예수어록-Q문서의 존재 가능성까지 제기하였다. 사도 이래 《성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확고한 믿음은 이제 무너진 것이다.

청년 튀빙겐학파의 연구로 대륙신학은 그리스도교가 존재의 위기에 직면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혹자들은 다윈주의가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위협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창조과학자들의 상상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진화론이 등장하자 마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대로 진화론과의 타협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에 발흥하였던 근대 역사학은 그리스도교의 존재를 위협하는 또 다른 도전이 되었으며, 교회의 가르침은 이제 근대 역사학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트뢸치는 그리스도교가 근대 역사학의 연구 방법을 과감히 수용해야 하며 근대 학문적 기틀을 갖춘 신학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혹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이 삼위일체와 같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부정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트뢸치, 하르나크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가르침에 대한 부정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동안 교회와 신학은 청중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기관이었지만, 이제는 진리가 아닌 학설을 말하는 곳으로서 자리잡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은 바로 그들이 신학을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닌 성서에 대한 해석을 가르치는 학문이고, 그것인 굳이 진리일 필요가 없었다고 믿었다는 점에 있다. 교회의 오래된 가르침은 이제 근대 역사학과 사회학에 기반한 학술적인 언어로 다시금 서술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트뢸치는 이 작업의 상당 부분을 끝냈으며, 이에 기반한 하르나크의 《그리스도교는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는 20세기 초에 베를린에서 전 세계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당시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보수적인 미국 교회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실상 미국 교회와 대륙 교회는 이미 19세기에 이르러 다른 양상의 발전을 보이고 있다. 만일 대륙신학에서 청년튀빙겐 학파의 실험 이후, 점차 근대적인 종교의 길을 모색하였다면, 미국은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었다. 교부들의 시대에 이단시되었던 전천년왕국설은 이 시대의 이단인 안식교에 의해서 부활하였으며, 《성서》를 기록된 그대로 믿는 축자영감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디오니시우스의 《네포스 반박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교부들은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신앙을 비판하였으며, 천년왕국은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에 대한 비유라 생각하였다. 아울러 오리게네스의 《요한복음》에 대한 이해에서도 드러나듯이 교부들은 《성서》가 사실을 기록한 문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즐겼다. 그러나 종말에 대한 두려움과 자유주의 신학-이 용어는 트뢸치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에 대한 반감은 이들로 하여금 안식교와 같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자신들의 신학적 방향을 모색하였으며, 이는 근본주의 진영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이면에는 슈바이처-아프리카 선교로 유명한 그 슈바이처다-와 같이 근대 학문과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알아내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슈바이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종의 시대착란증에 걸린 자로서 스스로 하느님이라 자칭하였다고 주장했는데, 아이러니는 이와 같은 슈바이처를 오늘날 근본주의 진영의 선교사들이 존경한단 것이다.) 그러나 과연 역사적 실존자인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가 일치할까?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불트만은 《성서》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가 불일치하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성서》를 신화로 보았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신화적인 세계관을 가진 구성원이 구상하고, 재구성한 문헌이 신화적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학자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역사적인 원형을 찾는 것을 포기하였다고 이해될 수도 있으며, 《성서》의 사실적 기록의 지위를 박탈하였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불트만이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가장 큰 원인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이래 대륙신학의 《성서》 비평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근본주의 진영에서 대륙신학의 《성서》 비평이 《성서》의 권위를 실추하고 있다는 비판은 어떤 의미에서 이해될만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교부들조차 기초적인 문헌 비평을 통해 《성서》를 정경과 위경을 나누고 경전의 신뢰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륙신학의 《성서》 비평이란 이와 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생성될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서》의 권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정과 명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성이다. 이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있게 한 원동력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신정통주의의 깃발을 들었을 때, 대륙신학의 보수적인 교계 인사들은 열광하였다. 그러나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는 여러모로 카이퍼, 바빙크의 네덜란드의 신칼뱅주의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비록 바르트는 종교 사회주의 진영에 비판적이었지만,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회주의 비판에 대한 거부에서도 드러난다. 신정통주의 진영의 또 다른 신학자 틸리히는 공산주의와 그리스도교는 인류의 갈등과 사회적인 아픔을 봉합하는 시대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였으며, 적어도 사회 문제에 있어 공산주의와 그리스도교는 궤도를 같이 할 수 있다 믿었다. 이처럼 이들은 사회 문제에 있어 사회주의 진영에 속해있지 않았으나, 그들과의 연대를 모색하였으며, 이를 통해 카이로스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정통주의 진영에서 급진파로 분류되는 본 회퍼가 히틀러 암살에 가담한 것도 어찌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당시 빌헬름2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하였던 자유주의 신학과도 다르며, 스스로 보수정당인으로서 활동하였던 카이퍼의 신칼뱅주의와 미국의 근본주의자들과도 구분된다. 물론 이 당시 지식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겠지만.

무엇보다 바르트는 트뢸치가 신학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도구에서 근대 사회학과 결합한 것에 큰 불만을 가졌다. 따라서 그의 구호, 즉 “하느님은 말씀하신다”는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감이 잘 드러난다. 자유주의 신학이 유행할 무렵에 그들 문하에서 신학을 배운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신학을 하나의 학문으로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실상 정통주의 신학이 끝날 무렵에 등장한 슐라이어마허를 시점으로 유럽 신학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슐라이어마허 이래 다수의 신학적 사조들을 자유주의 신학이라 규정하고 비판하였는데, 이로서 헤겔, 바우어, 리츨 등 트뢸치 이전의 신학자들조차 자유주의 신학자로 불리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물론 칸트,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에 이르기까지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정통주의 신학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르트, 나아가서 불트만, 틸리히 등 신정통주의 진영은 청년 튀빙겐학파 이래의 《성서》에 대한 비평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서》는 신화와 전설, 역사가 혼재된 문헌이지만, 그와 같은 “옛 전설” 또는 “신화”에서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 즉 케리그마가 내재되어 있기에 신화적인 요소들을 구분하고 제거하는 작업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의 이와 같은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노시스파의 《성서》에 대한 이해, 즉 《성서》는 여러 가지 암호와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였던 노년의 하르나크가 신정통주의 진영을 그노시스파라고 비판한 것은 어찌 보면 이해 못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자들이 《성서》의 고등비평을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어 또 그노시스파와는 구분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이는 바르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비아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르트는 설교 내내 ‘하느님의 말씀에 이르길’이라고 하지만 나는 설교 내내 바르트가 말하는 것만을 들었다.” 설교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이란 말인가? 아울러 《성서》에 대한 역사적인 원형의 복원이 진정으로 불필요하단 말인가? 따라서 신정통주의 진영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이게도 그들 내부의 균열로 시작되었다. 케제르만 등 불트만좌파는 자신의 스승을 대중 앞에서 비판하기에 이르렀으면, 역사적 예수의 원형에 대한 탐구는 오늘날 역사적 예수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교부들의 확고한 고백과는 다르게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를 답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였던 “신 죽음의 신학” 이후,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부활을 하나의 사실로 믿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럼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자들을 모두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다고 답할 수 있다. 그 구원은 영혼의 구원일 수도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해방하는 혁명일 수도 있다. 이제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여전히 강하고 운동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영혼의 구원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희망이며, 사회 부조리에 분노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을 압제하는 반동 세력의 괴멸과 혁명을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사회의 부조리가 점차 사라지고, 인간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카이로스를 향해 진일보하는 걸음이 멈추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살아서 인간 세계를 주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화이며, 진리와 억압받는 민중은 항상 승리하니까. 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항상 필요하지 않을까?

2013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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