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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스∙임호영의 《북한과의 일괄 타결》을 읽고

계연춘추 2021. 8. 21. 15:53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과 임호영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북한과의 일괄 타결》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관련 기사는 아래와 같다.

https://www.khan.co.kr/politics/defense-diplomacy/article/202108041425001

“북한을 동맹으로 만들자” 임호영·브룩스 한·미 두 장군의 파격 제안 [임호영 전 한미연합사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과 임호영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지난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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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읽고 “세상에 너무 늦게 나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이 20년, 아니 10년만 일찍 발표됐어도 세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이미 효력을 상실한 구상에 불과하며, 북한은 한동안 아무런 거리낌없이 한국과 강대강强對强 충돌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부터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소련 붕괴 이후 동아시아 질서(1991-2021년). 미∙중∙러 사이의 협력 기조가 지속되면서 이 같은 노선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한국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는데 반해, 정치적 또는 지정학적 대립을 지속한 북한과 일본은 점차 세계질서에서 소외되어 갔다.

냉전시대 북한정권이 존속할 수 있던 시대적 배경에는 미국과 소련의 충돌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있었다. 실상 이 이데올로기 대립은 영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대립(“심장지대”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의 연속선상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북한은 이와 같은 대립을 통해 아무런 대가 없이 사회주의 진영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으며, 이들의 도움을 통해 국내 부족 수요를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키신저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미∙중 양국간의 지정학적 연대와 더불어 미국과의 이데올로기 대립 종식을 추구한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인해 미∙중∙러 3개국 사이에 평화 지향적이고 건설적인 외교 관계가 확립됐으며, 세계는 양 강대국의 핵전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미국을 세계 유일 패권국으로 하는 일원화된 국제질서 속에서 하나의 정치제도(서구식 민주주의)와 이데올로기로 통합된 지구촌을 꿈꾸기에 이른다. 이런 국제질서 속에서 미국, 중국, 러시아 3개국과 모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만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한국은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과 함께 중국, 러시아와의 대립을 종식하고 호혜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 평화의 시대에 국가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와 달리 북한, 일본은 이와 같은 지구촌 시대에서 지정학적 또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미국 또는 중국,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이들은 세계화 논의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경우, 자신들의 체제 유지 자체를 미국에 대한 복수심에 의존했으며, 일본은 동아시아를 놓고 중국과 벌이는 지정학적 경쟁을 지속했을 뿐만 아니라, 북방4도 문제로 인해 러시아와 지속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북한, 일본의 이 같은 움직임은 냉전에 최적화된 정치적 행보였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지난 30년간 세계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이들이 시대착오적이었고,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미국과 중∙러 군사협력체의 지정학적 대립구도 확립은 역설적으로 우리나라로 하여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했지만, 이와 달리 일본과 북한은 자신들의 지정학적 역할을 이용해 냉전 시대처럼 모종의 반사이익을 누릴 가능성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자신들이 미국과 중∙러 군사협력체와의 대립 속에서 국가적 생존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제적 이익까지도 얻을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베이징 지도부 또한 출해구 문제로 인해 북한을 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이 지속적으로 존속함으로써 자신들을 대신해 한국과 일본을 견제해 주기를 바랄 것이며, 북한은 이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대신 정권 유지에 필요한 자금 및 자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중∙러 군사협력체라는 뒷배가 생긴 북한은 이제 한국과의 외교에서도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과거 북한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확립되자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정권 생존을 위해서라도 핵무기 개발에 매진해야 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이 “심장지대” 세력과 미국과의 완충지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①미국과의 외교적 마찰 우려와 ②적당한 개입 명분 부재, 그리고 ③자국 경제 발전이 더 시급한 고로 북한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만일 1991-2021년 사이 백악관이 브룩스∙임호영의 주장과 같이 북한 김정일 정권을 끌어안았다면 북한이 미국의 동맹국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국에 상당히 우호적인 국가가 됐을지도 모르며, 남북 평화통일 프로세스는 상당 부분 진전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설사 미국이 북한에 분노한 나머지 대군을 이끌고 북상했더라도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의 전면전까지 감수하면서까지 대 한반도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대동강 또는 청천강을 경계로 북한 정권을 존속시키는 것에만 만족해야 했다. 따라서 브룩스∙임호영의 대북 유화책은 미국이 전세계적 패권국가일 때 그나마 실험해 볼 수 있는 정치적 실험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 대립구도가 다시금 확립된 지금 저런 대북 유화책이 얼마나 큰 효용성을 발휘할지 잘 모르겠다. 예전에 북한 정권의 존속만을 바라던 중국은 이제 남북한 연방제 통일을 주도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내려 할 것이며, 자국을 겨누는 또 하나의 칼을 없애려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김정은 정권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중∙러 군사협력체가 북한을 존속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그는 이런 중국과 러시아의 정치적 의도를 이용해 정권 유지에 필요한 자금과 자원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 달리 말해 지난 30년 간 전세계는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만 국가 경제 성장이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중국이라는 또 다른 대안이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이 나라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요구하지도 않고, 정치 제도 개혁을 강요하지도 않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독재자의 정권 유지에 필요한 자금과 자원을 제공해준다. 당신이 김정은 위원장이라면 정권 붕괴 위험이 있는 정치 제도 개혁과 핵무기 폐기 등 요구사항을 받아들여야만 경제 개발을 허락하겠다는 미국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정치적 개혁에 대한 요구 사항 없이 자국에 대한 시장 개방과 자원에 대한 권리만을 요구하는 중국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너무도 분명하다. 한미 양국이 북한에게 아무리 조건부 유화책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김정은 정권은 중국과의 전통적 관계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브룩스∙임호영의 《북한과의 일괄 타결》이 이제서야 세상에 발표된 것이 너무도 아쉽다. 이 정책은 진작에 실험했어야 하며, 북한에 대한 경계 태세를 유지하면서도 일관성을 가지고 꾸준히 추진했어야 한다. 이제 와서 이런 정책을 실행한들 (베이징이라는 뒷배가 있는) 북한이 우리의 요구 사항을 받아줄 리 없다. 좋게 말하면 세상에 너무 늦게 나왔으며, 나쁘게 말하면 시대착오적 주장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국제질서는 이미 달라졌으며, 지난 30년간 우리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더 끔찍한 사실은 이 지정학적 대립이 백악관의 노력 없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동부 점령 이전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북한에 대해 지대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 정권의 존속을 결심한 이상, 북한은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것이며, (개헌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대통령 5년 임기 내 남북 관계 진전을 보기위해 이런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줄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북한에게 남북 관계 주도권을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에게 유리한 연방제 통일이 실현될 수도 있다(북한이 한국 땅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형식의 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따라서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아래와 같은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와 달리 북한은 더 이상 미국,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경제 발전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정학적 대립구도가 강화될수록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 정권을 존속시키려 할 것이고, 북한은 이들의 지원을 등에 엎고 남북 관계 주도권을 가져오려 할 것이다.

만일 조급증을 이기지 못하고 해빙 무드 조성을 위해 북한 측 요구를 모두 들어줄 경우, 남북관계 주도권을 북한에게 빼앗길 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 북한에게 유리한 연방제 통일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정권 명운을 거는 것이 아니라,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전략적 인내를 지속해야 한다. 물론 북한과 모든 교류를 중단하거나 어떤 형태의 남북 협력 사업도 추지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단지 지금처럼 휘발성 강한 평화 무드 조성 이벤트에 우리의 정치적 역량을 쏟지 말자는 뜻이다. 어차피 그런 이벤트가 일어나도 북한과의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미국과 중∙러 군사협력체의 대립이 끝나기 전까지 북한 정권은 존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화 무드 조성을 위해 북한 측 요구를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것은 남북 관계 주도권을 북한에게 넘겨주는 최악의 상황만을 불러올 것이다.

따라서 브룩스∙임호영의 《북한과의 일괄 타결》은 여러모로 아쉬운 글이다. 이 글은 세상에 너무도 늦게 나왔고, 여러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시점에 발표됐다. 하물며 국내 여론조차 이 글에서 주장하는 바를 지지할지 잘 모르겠다. 우리 젊은 세대 대다수는 북한과의 대립을 지속하기를 원하며,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대북 유화책을 실험해야 하는 정부에게 큰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한다.

사견임을 전제로 말하자면 우리는 북한과의 지난한 싸움에 돌입해야 한다. 이 싸움은 군사적인 대립(오히려 북한과의 군사적인 대립은 이제 종식할 때가 됐다)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싸움이며, 남북 관계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체스 게임과도 같다. 이 싸움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관성과 인내심이다. 대북 정책에 대해서만은 우리 정부가 일관성을 가지고 꾸준히 추진할 수 있는 사업 위주로 진행해야 하며, 휘발성 강한 정치적 이벤트의 유혹에서 벗어나 인내심을 가지고 북한 정권과 협의점을 꾸준히 찾아야 한다. 나 또한 북한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할 경우,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 및 남북 정상회담 필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이벤트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상황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니라고 본다. 남북 정상회담 또한 김정은 위원장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사안을 협의해야 할 때만 만나고, 단순히 만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벤트성 회동은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다. 북한 측에서도 그런 이벤트성 정상회담에 대해 불만을 가질 것이다(만나면 얻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북한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아울러 중국, 러시아와 북한 문제를 놓고 지속적인 대화를 해야 하며, 한반도 문제에 있어 이들과의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결국 북한 정권의 버팀목이 되는 것은 중국과 러시아 2개국이며, 우리는 이들이 한반도의 이해관계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단지 미국과의 군사동맹 때문에 이들과의 관계를 단교 수준으로 악화시키겠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고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우리는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이들과 경제적 협력을 이어 나가야 하며, 한반도 문제에 있어 이들의 양해 내지는 협조를 구해야 한다. 지난 날, 우리의 정책이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베이징을 통해 북한의 정치 개혁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에게 정치 개혁을 강요하기만 했을 뿐, 이들의 정권 존속 욕구와 독립성을 무시한 측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중국에게도 우리 측 요구의 역사적 정당성과 합리성에 대해 이야기만 할 뿐, 단 한번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 결국 국민의정부 햇볕정책 이래 민주당 계열의 대북 정책을 돌이켜보면 타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 측이 제시한 답변만을 강요하는 상황이 지속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외교 정책이 성공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국제질서가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이 유일 패권국인 시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언제 끝날지 모를 미국과 중∙러 군사협력체 사이의 지정학적 대립만이 오랜 시간 지속될 것이다. 이 대립이 어떤 식으로 끝날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럴 때일수록 대북 관계에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①명확한 철학과 ②인내심, 그리고 ③정책적 일관성이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북한과의 협상에 임해야만 그나마 우리가 남북관계를 주도할 수 있다. 만일 미국이 지난 30년 동안 북한에 대한 조건부 유화책을 실행했다면 역사는 달라졌겠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 같은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트럼프 대통령으로 인해 미∙중의 지정학적 연대가 완전히 깨지고 미국과 중∙러 군사협력체의 정치적 대립 국면으로 들어가려는 시점에 이런 글이 발표된 것은 여러모로 아쉽다. 그래도 한 시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발표된 글이라 생각하고,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이제 와서 이런 좋은 내용의 글이 발표된 것이 너무도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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