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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과 테클라 행전》: 고대 기독교는 페미니즘을 어찌 받아들였는가?

계연춘추 2021. 4. 22. 02:13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큰 곡해는 이 운동이 19세기에 시작되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페미니즘 운동과 유사한 여성주의 운동이 고래로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레스보스(Lesbos) 일대에서 성행하던 사포(Sappho) 류類 페미니즘은 분명 여성 간의 성행위가 동반된 여성주의 운동이기는 하다.
 
사포 당시 여성주의 운동이 유독 지중해 동부 연안지대에서 유행한 까닭은 이 일대 남성들이 주로 뱃사공이나 무역업, 어부 등 출타가 잦은 업종에 종사하다 보니 여성이 홀로 생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들은 교육이나 모직업, 매춘에 종사해 생업을 이어 나가야 했다. 자연스럽게 경제적 독립을 얻은 여성들은 식자층을 중심으로 남성을 모방해 동성간 성행위를 즐기기에 이르렀다.
 
공교롭게도 고대 기독교는 바로 이런 여성주의가 유행했던 지중해 동부 연안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고대 기독교 문헌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페미니즘과 충돌한 기사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헤르마스의 목자》를 살펴보면 단테 《신곡》의 베아트리체를 연상케 하는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계시를 헤르마스에게 주었는데, 이로 보아 여성에 대한 고대 기독교의 수용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2세기 전후로 상당히 진취적인 여성상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외경 《바울과 테클라 행전》을 예로 들어보겠다.
 
필자가 《바울과 테클라 행전》에 주목하는 이유는 당시 지중해 동부 연안지대의 여성주의 운동이 소멸되거나 고대 기독교에 융합되는 과도기적 성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몇 가지 특징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테클라의 옹호자는 “여성들”이다. 바울에 대한 연정 때문인지, 아니면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이코니움 지역의 부호의 딸이었던 테클라는 자신의 약혼자 타미리스를 버리면서 사도 바울이 갇혀있는 감옥까지 찾아온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테클라가 성관계를 가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테클라가 바울의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를 행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관계는 일반적인 사제 관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벼운 성적 접촉도 허용된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같은 성적 접촉이 있었다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사제 간의 성적 접촉은 사회적 통념에서는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노년의 테클라가 청년들에게 강간당하기 직전에 여전히 처녀였던 것으로 보아 사도 바울과의 직접적 성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강력히 추정된다.
 
하지만 바울은 정작 자신을 따라 안티오크까지 따라온 테클라와의 관계를 시리아의 법관 알렉산데르 앞에서 부인한다. 이에 알렉산데르는 테클라를 성추행 하려고 시도하지만, 테클라는 완강히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데르의 면류관과 옷을 벗겨버린다. 이에 화난 알렉산데르는 그녀를 모함해 안티오크 원형 경기장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리지만, 로마황실 구성원인 트리피나와 귀부인들은 그곳에서도 (다수의 남성들과는 다르게) 그녀에 대한 동정의 눈길을 보낸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 저항하는 자들은 연대의식을 갖춘 여성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도 바울과 같이 진보적인 남성 지식인은 그녀를 깨우칠 수는 있어도 그녀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했다.
 
심지어 저자는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경기장의 암사자조차 테클라의 편에 서서 숫사자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저자는 여성의 억압은 결국 여성 연대만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둘째, 테클라의 세례는 여성이 스스로 주체성을 찾아야만 함을 뜻한다. 경기장에서 테클라는 갑자기 생겨난 물웅덩이에 몸을 던지면서 “이제 내가 세례 받을 때이다”라고 외친다. 여기서 우리는 남성 위주의 사회제도를 거부하고 스스로에게 세례주는 테클라의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스스로 확립하는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당시 대부분의 종교 제례와 밀교 의식은 남성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미트라 신앙의 세례의식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아테네 엘레우시스 제전도 선별된 남성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대 기독교는 교육자로서 여성의 직위를 인정하는 거의 몇 되지 않는 고대 종교였다. 심지어 테클라는 미라에서 사도 바울을 마지막으로 만난 다음 그에게 자신이 세례 받았음을 알리며, 그와 영원히 작별한다. 이어 셀레우키아 인근에 거주하기 시작한 그녀는 여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사포의 여성 공동체가 여성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로서 탈바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셀레우키아 여성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고대 기독교 여성주의와 사포 류 여성주의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포 類 여성주의에서는 여성 간의 성행위를 즐긴 까닭은 그리스에 만연한 남성 동성애 행각에 대한 일종의 보복심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테클라는 남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리는 남성에게서 부여된 것이 아닌 천부적 권리라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미라의 사도 바울을 찾아가서 남성인 바울의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테클라로 대표되는 기독교 여성주의 운동가들이 남성을 자신들을 억압하는 대상이 아닌 신에게서 서로 다른 역할을 받은 상호간 존중하는 대상으로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사포의 여성주의 운동과는 다른 고대 기독교적 여성상의 확립에 기여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텍스트는 고대 기독교가 지중해 동부 연안지대에서 유행하던 여성주의를 어찌 소화했는지 보여준다. 지중해 동부 연안지대의 여성주의 운동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독교화되었다. 그 기독교화되는 과정은 대체로 여성의 권리가 남성과 함께 천부적인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다르지만,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같은 뜻을 지향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부각하고 있다. 아울러 고대 기독교 텍스트로서 《테클라 행전》은 분명 사포와는 다른 독자적인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테클라는 주체적이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여성이지만, 그럼에도 그리스 남성의 변태적인 행위를 모방하거나 따라하기보다는 자연적 도덕률에 따라 정결한 삶을 추구하며, 남성과는 다른 또 다른 여성만의 삶이 있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 선언하고 있다.
 
최근 페미니즘이 범람하면서 우리는 초창기 페미니즘 운동이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해야 할 때가 왔다.
 
“무엇이 바람직한 여성상인가?”
 
나는 이 텍스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생각한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내가 하려는 말은 이 책에 다 들어있으니 관심 있는 자들은 읽기를 권하는 바다.

※ 2019년 1월 2일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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