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고대 일본 한시의 특수성에 대하여

계연춘추 2021. 4. 8. 22:13

H선생이 일본 한시에 대한 글을 썼다.
 
선생은 한동안 일본 한시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는데 최근 초야 지식인계에서 중국의 강동 4대 천재로 불리는 C선생이 일본 한시가 조선, 베트남만 못하다고 비판하자 일본 한시의 아름다움과 특수성에 대해 설명하고자 이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C선생이 그 글을 쓰기 전에 나에게 조선 한시에 대해 물은 적이 있고(물론 두 사람 모두 일본 한시를 비하한 적은 없다), 南方週末에 발표된 이후 나에게 글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나 또한 이 사건에 아주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H선생은 나의 둘도 없는 벗이요, 내가 아는 바로는 H선생과 C선생 또한 절친한 관계다. 그리고 (진심으로 생각하건데) 두분 모두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일본 한시가 직면했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해 몇 자 적어보도록 하겠다.

河岳英靈集 敘에 “聲律風骨始備”라 한 이래 唐詩의 성률적 형태는 大同律에 기초해 詩腦髓에서 새로이 규정한 성률적 특징에 따라 시를 쓰도록 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성률 규범은 과거시험에 雜文을 추가함으로써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강제되었고, 李白과 같은 이질적인 시인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새로운 성률적 규범에 따랐다. 아울러 당제국이 규정한 법칙은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신라까지 전해졌으며, 이들의 한시 또한 빠르게 大同律에서 律詩로 과도했다. 물론 고려 초 심약 문집이 평양에 있던 것으로 보아 六朝 이래 시문은 고려시대까지 한반도의 지식인 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지만 이미 대세는 白居易의 新樂府로 대표되는 정치적이면서 詩教에 충실한 새로운 시풍으로 넘어갔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있었다. 견수사와 견당사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중국 외교는 백강전투로 인해 한동안 중단되었으며, 당나라 중기 이후에는 동방 해상 무역권을 독점하려는 신라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류가 그렇게 원활한 상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본은 당고종-측천무후 집권기 동안 중국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은 성률 규칙 변혁기에 놓여있던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되었다. 당연히 새로운 율시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일본 한시는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되는데 (1) 大同律에 따라 시를 쓴다. 이 때문에 懷風藻의 시를 잘 살펴보면 율시는 아니지만 大同律에 부합하는 시들이 더러 있다. (2) 아무런 성률적 규범이 없는 시를 쓴다. 흔히들 고체시는 성률적 규범이 없다 생각하는데 이는 진실로 잘못된 생각이다. 고체시야말로 성률뿐만 아니라 문자의 형태미, 그리고 나트야-사스트라에서 유래한 雙聲, 疊韻을 다 따져서 써야 하는데 어찌 아무런 규범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고로 (2)에 해당하는 시들은 고체시의 건축미를 흉내 냈을 뿐, 고체시가 가진 형식적 아름다움을 대체로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략 일본에 율시가 전해진 것은 성당 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文鏡秘府論만 보더라도 당시 일본인들이 체계적인 성률 지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당나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중국인들조차 모르던 沈約의 팔병론 관련 시격까지 수초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시대의 성률 규칙이 아무런 규칙 없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연구자들 입장에는 다행이지만 격률의 전파라는 입장에서 보면 과연 좋다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율시는 謝靈運에서 시작하여 “팔병론→大同律→上官體→율시”라는 역사적 흐름이 있는데, 당시 일본 문인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단지 성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면 모두 抄錄하여 일본에 전했으니, 당연 시를 배우는 이들은 고금의 격률을 혼동할 수밖에 없고, 결국 엄격한 의미의 율시를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 아닐지 생각해본다. 아울러 율시의 규칙에 대한 이설이 많으니 당연 성률보다는 시의 다른 요소들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던 것 같다.

H선생과 C선생이라는 천재에 비할 바 아니나 마침 일본 한시의 성률적 특징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어 몇 자 적으니 見笑하시길 바란다.
 
2020년 12월 17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