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동안 이 조용한 블로그의 조회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지인에게 들어보니 몇몇 글이 SNS상에서 살짝 퍼졌다고 하는데, 부족한 사람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드릴 것이 없다.
이 블로그는 내가 지인들과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몇몇 사안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한 글을 올리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 올라는 글 대부분이 내 일상에서 지인들과 단체방이나 식사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를 적었거나, 내가 지인들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인 경우가 많다. 상술한 이유 때문에 이 블로그는 내 단조롭고 따분한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이곳의 내용이 내가 모르는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민망하고, 속내를 들킨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학문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관심있어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점은 여러 의미에서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간 국내 연구자들이 지정학을 지리결정론이라 곡해하고, 사이비 학문이라 비난하며, 설사 차용하더라도 “레벤스라움(생활권)”과 같은 영토 확장 주장(간도 관련 세미나)만을 취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서 누구도 일반적인 지정학에는 관심 없는 줄 알았다. 여기에 더해 국내에 출판된 지정학 전문서가 아주 소수(스파이크먼과 브레진스키, 프리드먼, 자이한 외에 다른 연구자의 책이 번역되었는지 잘 모르겠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나의 이 같은 생각을 굳히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국내 학계는 미국에 유리한 해권론과 “행운섬” 이론에 기반한 학설만을 다루다 보니(엄밀히 말해 지정학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이런 풍토에서 성장한 우리나라 지정학 연구의 결론은 항상 편향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륙을 연구하는데 있어 놀랄 만큼 무지하거나 균형 잡히지 못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이 블로그에 지정학 관련 글을 올릴 당시 “그래도 누군가 지정학에 관심을 가져줬으면”이라는 생각에 글을 공개한 측면도 있다. 지인들은 연구 성과를 걱정하며 책이나 논문으로 먼저 출판하라고 했지만,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국내 학계의 Anti-지정학적 분위기상 논문 개재는 당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책을 출판한들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국내 학자들은 미국의 패권이 영속하리라는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 수집만을 원했지, 진정한 의미의 지정학이 한국에 소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따라서 내가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여기에 더해 나 또한 지정학으로 학위를 받은 것이 아닌지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학문에 관심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놀랍기도 하고, 어쩌면 나야 말로 국내 지정학 수요에 대해 잘못 판단한 측면이 있지 않나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어쩌면 사람들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지정학에 관심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단지 내가 그간 만난 사람들의 냉소적 반응과 국내 연구자들의 천편일률적인 결론(이들의 연구는 마치 특정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됐다), 그리고 지정학 도서가 출판되지 못하는 출판 시장의 현실 때문에 지정학에 대한 수요를 실제보다 낮게 측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글보다는 사람들이 지정학에 관심 가져 주셔서 고맙고, 또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차갑고 냉혹한 학문은 아니니 여러 좋은 지정학자들의 글을 찾아 읽어 보시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다만 이 블로그에서는 국내 정치에 대한 글을 일체 쓰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내가 국내 정치에 관심이 없다(그리고 내가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를 소제로 글을 쓰는 곳이니 당연 국내 정치에 관한 내용이 있을 리 없다). 나이가 드니까 정치적 성향이 사라지는 것도 있고, 지정학 책을 접하다 보니 독자적인 공간 영역을 가지지 못한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라는 생각도 들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권 언어의 갈라파고스화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해도 곡해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좌파와 우파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모든 국가는 다수 구성원의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이 다수의 행복을 어찌 추구할지에 따라 좌파와 우파로 나뉘게 된다. 좌파 정당 또는 국가의 경우, 국가를 (다수의 행복 증진을 목표로 하는) 이데올로기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데 비해, 우파 정당 또는 국가는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공동체의 선을 이끌어내는 도구로서 이해한다. 이와 같은 국가 기구의 성질에 대한 이해는 좌파 국가와 우파 국가의 통치에서도 드러나는데, 여기서는 구소련∙중국의 민주집중제와 영미권의 의원내각제라는 전형적인 예시를 통해 이들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민주집중제 국가의 경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내부 집단에 대해서 반 인권적인 전제정치를 실행하는데, 이는 그들이 국가를 이데올로기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불행을 용인해도 된다는 통치 이념 때문이다. 이와 달리 내셔널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의원내각제 국가(우파 국가)의 경우, 공동체 내부의 합의를 중시하고, 이 때문에 일정한 합의 절차에 의해 결정된 사안은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이는 루이16세의 사형을 대하는 자코벵파와 지롱드파의 의견차이에서도 드러나는데, 자코벵파는 혁명 이념을 배신한 국왕을 죽여야만 한다고 믿었고, 반대로 지롱드파는 국가 구성원의 합의를 모을 수 없는 이상, 이들의 합의에 의해 국왕 직을 유지하게 된 루이 16세를 죽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다수의 행복 증진을 위한 방법론에 대한 차이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좌파 국가의 극단적 예시라 할 수 있는) 민주집중제 국가는 ①국가를 통합하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며, ②내셔널리즘을 억압하고, ③엘리트 지배체제를 선호하게 된다. 반대로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의원내각제 국가들은 ①내셔널리즘에 기반한 시민종교가 존재하며, ②공동체 내부의 합의를 중시하고, ③여론의 지배를 받는 성향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대립을 바라보면 우리는 한국 정치권은 통상적인 의미의 좌파와 우파의 대립에서 벗어난 (제3의 언어에 기반한) 대립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의원내각제 국가의 경우, 의회라는 공동체 내부 합의를 위한 토론의 장을 제공하면서도, 자유주의 이념 자체가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가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만일 자유주의가 정치적인 합의(공동체 합의의 보편성)를 넘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가지게 될 경우, 공동체 내부의 합의는 깨지고, 자유주의 또는 자유주의와 유사한 보수주의의 탈을 쓴 극우 세력이 자유주의 가치관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정적들을 숙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공동체 합일을 위한 수단이지, 만일 자유주의가 국가를 조직하고 통일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게 된다면(또는 각기 다른 이념 간의 공존을 위한 사상이 아닌 폭력성을 가진 이념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면), 국가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국가 구성원에 대한 파쇼 전제정치를 실시하게 될 것이다.
이와 달리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국가를 체계적으로 조직한 민주집중제 국가의 경우, (공동체 내부의 합의를 위해 존재하는) 정당 정치를 무력화시키는 대신 전국의 정치 지망생을 하나의 정당에 가입시킴으로써, 이 정당 자체를 거대한 인재 풀로 만든다. 이 때문에 이런 정당 내부에서는 정당의 합일성보다는 개인의 역량이 두드러지고, 내부 토론에서 타인을 설득시킬 수 있는 논리를 제시하는 자가 추대 형식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런 정당일수록 정책의 결정 과정은 불투명하고, 과두제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인들은 자신이 믿는 이데올로기가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하며, 이와 같은 불완전함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정책이라 할지라도 국가 발전을 위해 수용해야 하는 용기와 결단력을 가져야 한다. 이런 민주집중제 국가가 직면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다름 아닌 극좌파의 집권이다. 만일 당내 극좌파들이 정치적 명분을 이유로 현실에 타협하려는 자들을 수정주의라 비난하고, 이데올로기를 위협하는 어떤 타협적 행위도 거절할 때, 국가 조직은 경직되고 성장 동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원리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과두독재체제로 넘어가게 된다.
상술한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내가 생각하는 좌파-우파는 한국 정치권에서 말하는 보수-진보와는 다르다. 일례로 나는 내셔널리즘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데, 현재 진보진영 인사들은 반일이라는 내셔널리즘 구호를 이용해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심지어 내셔널리즘 담론에 젖어 만주와의 “레벤스라움(생활권)”을 외치는 이들의 정치적 성향이 주로 노무현-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현재 한국 진보진영은 내가 원하는 수준의 열린 사회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중국과의 대립각을 세우는 보수진영의 정치적 행보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와 다르게 중국은 자신들의 지정학적 공간을 확보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미∙중의 지정학적 연대는 미국의 브레진스키, 스코크로프트 등이 인정할 만큼 나름의 이유와 타당성이 존재한다. 만일 미국이 중국과의 지정학적 대립을 지속하면, 중국은 (국가 생존을 위해) 아시아에서의 이익을 일부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러시아와의 사실상 동맹 관계를 이어갈 것이고, 러시아는 후방에 아무런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방면 진출을 시도할 것인데,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미래인가? 한반도의 역내 안정을 위해서라도 중국과의 충돌에 우리가 앞장서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오늘날 보수 진영은 인터넷 여론에 흔들려 국가를 통치할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고로 내가 한국의 극우화 가능성에 대해 말할 때는 특정 정당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여론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정당도 극우화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정치 현상을 설명할 때, 내가 말하는 극우화는 특정 정당의 극우화가 아닌 극우적인 운동이나 사상이 정당에 침투해 정당의 정책 기조를 바꾸는 일체 행위 및 이로 인해 발생할 이벤트를 뜻하지, 특정 정당에 대한 비판이라 보는 것은 곤란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비판적이다. 내가 견지하는 정치적 언어 또한 한국의 정치적 현상을 설명하기보다는 지정학적 공간을 확보한 강대국의 정치제도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다 보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지해 주시고 글을 읽어 주셨으면 한다.
그럼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 지정학에 많은 이들이 관심 가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끝 맺는다.
※ 아마도 이 글은 한달 정도 지나서 지울 것 같다. 아울러 이 블로그가 다시금 조용해지기 전까지 글 쓰는 것을 가급적이면 자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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