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가의 복음서》에 보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 가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여기서 낙원이라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παραδεισοs(정원)의 의역으로 본래는 페르시아식 정원(Pairidaeza, 폐쇄식 정원)을 뜻한다. 크세노폰의 《경제론》에 보면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자가 소유한 사르디스의 폐쇄식 정원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정원은 대체로 여러 종류의 식물이 정확한 각도에 따라 기하학적 모형을 이룬다고 기술한바 있다. 키루스 왕자는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에게 자신이 이 식물을 직접 재배했음을 자랑했는데, 다양한 기록으로 보아 이런 정원은 비단 사르디스 뿐만 아니라 바빌론, 파사르가다에 등 제국 전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의 정원이었던 것 같다. 대체로 이런 폐쇄식 정원은 카나트 관계시설이 수도교 역할을 했는데, 파사르가다에 유적을 근거로 추정해보면 페르시아인들은 자그로스 산맥 아래 흐르는 지하수를 지정한 지점까지 끌어와 정원에 물을 공급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끌어온 지하수는 소형 댐과 수문을 통해 공급량을 조절했으며, 제한된 구역 내부에만 물을 공급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παραδεισοs가 가지는 역사학적, 문학적 의미를 되새길 수밖에 없다. 일단 παραδεισοs가 폐쇄적인 특정 공간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왕 또는 귀족이 직접 정원을 가꾸고 식물을 기르는 곳이라는 공간적 특징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폐쇄식 정원은 정원의 주인에게 선택을 받은 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일 뿐만 아니라, 기하학적 도형으로 구성된 이상적인 형태를 지향하는 (현실과는 구분된) 공간적 특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이 공간은 절대적 주권자의 의지가 완전히 반영되는 공간이기도 한데, 이쯤해서 우리는 παραδεισοs와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학설에 따르면 παραδεισοs는 단지 구별된 공간으로써 이상적인 정원을 뜻한다 믿었지만, 사실상 이 같은 παραδεισοs를 소유하는 것은 페르시아에서도 왕과 귀족, 부유층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고, 소유자의 미적 취향이 충분히 반영된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이는 운동성을 강조하는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와의 사전적 의미는 다르지만, 절대자의 의지한 반영된, 또한 이상적 형태를 구현하는 공간이라는 점에 있어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어쩌면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의 최종 목적지는 παραδεισοs가 아닐까?
παραδεισοs에 출입할 수 있는 권리는 오로지 정원의 주인에게 있는 바와 같이 신적 의지가 반영된 이상적인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닌 신적 의지와 선택에 달려있다.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와 같이 우리는 이 정원에 들어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정원의 주인이자 정원사이신 하느님의 섭리를 찬양하며, 기하학적 도형 형태로 꾸며져 있는 여러 식물을 감상하면 그만이다.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우리의 지적 의지는 완전히 배제된다. 왜냐면 이 공간은 오로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만이 나타나는 공간이요, 하느님께서 직접 간섭하시는 이상적인 기하학적 부호들로 구성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당연 이런 공간은 신적 의지만이 반영된 이상세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데,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황홀경에 빠졌을 당시 했던 영적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14년 전에 세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 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 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 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중략)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 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바울서신은 오늘날에도 실제 저자와 관련해 논쟁의 여지가 있는 텍스트지만, 그럼에도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사도 바울이 55-56년 사이에 서술했다는 점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책의 저자가 사도 바울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이 같은 체험은 플로티노스가 황홀경을 체험했을 당시 몸과 영혼이 분리된 망아적 체험을 떠올리게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플라톤주의와의 연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도 바울이 유대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우주의 세번째 층위에 신적 의지만이 개입된 낙원이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낙원에 대한 기술을 살펴보면 우리는 고대 그리스도교에서 사자가 죽은 다음 παραδεισοs에 가리라는 믿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지상세계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신적 의지와 섭리만이 역사하는 특수한 공간이 있다 믿었으며, 하느님에게 선택된 자들의 영혼이 휴식하는 장소로 생각되었다. 또한 하느님께 선택을 받은 자들이 사후 παραδεισοs에 간다는 믿음은 유대교의 사후 세계관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인간이 죽으면 스올에 떨어지고, 부활하는 날에 육체가 다시 살아나리라 믿었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적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대인들은 점차 사후 부활의 순간에 인간의 죄는 심판 받을 것이며, 영혼 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게헨나(Gehenna)가 존재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게헨나조차 영원히 고통받는 불교적 의미의 팔열팔한지옥이 아니라 정화를 위해 몸과 영혼이 일시적인 고통을 받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게헨나가 영혼까지도 불사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게한나도 공간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유대 왕국 시절, 유대인들은 힌놈 아들 골짜기(Gue ben Hinnom)에서 인신공양 제사를 비롯한 외래 종교 제례를 올렸으며, 이후로도 성전 등지에서 배출된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여기서 동물 사체에서 빠져나온 피와 기름이 한데 뭉쳐 타오르는 광경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는데, 이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예수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사후 죄 지은 자의 영혼이 받을 심판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울러 부자와 라자로 예화를 통해 우리는 παραδεισοs가 게헨나와 대립되는 공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이에 대해 학술적 이론이 제기될 수 있지만 필자의 소견으로 보아 “아브라함의 품”은 παραδεισοs에 대한 문학적 표현으로 보인다). 《성서》는 게헨나의 존재를 통해 죄인에 대한 강력한 심판이 말세에 있음을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심판은 그의 영혼이 정화되기 전까지 지속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παραδεισοs는 하느님께 선택을 받은 자만이 갈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을 뜻하지만 그 주권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있으며, 인간의 의지는 (적어도 παραδεισοs의 출입이라는 문제에 국한할 경우) 완전히 배제된다.
그럼 어떤 자만이 παραδεισοs에 들어갈 수 있는가? 비록 《성서》의 기록은 분명하지 않지만 부자와 라자로 예화와 십자가의 강도의 예를 통해 우리는 ①이 세상에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들과 ②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παραδεισοs와 “아브라함의 품”은 전혀 다른 공간이며, ①에 해당되는 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고, ②에 해당하는 자는 παραδεισοs에 간다고 주장에 대해 필자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겠다. 다만 이 경우, παραδεισοs는 게헨나와 대립되는 공간이 아니라 막연한 이상적 세계를 뜻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가난한 자를 위한 천국을 외치지 않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부자를 위한 천국을 외치며, 가난한 자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부끄러운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필자가 모 대형교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교회 건물 밖에서는 일무리의 사람들이 (교회의 재정적 문제로 인해) 시위하는 장면을 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 중직자로 보이는 한 여성이 높은 곳에서 동일한 광경을 내려다보더니 저들을 비하하는 말을 내뱉고 교회 내부로 들어갔다. 어느 때부터 우리는 암브로시우스처럼 교회 주교로 선출되자 마자 자신의 재산을 모두 헌납하는 목회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목회자는 빈민들과 함께하기 보다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풍요로움을 선물해 주기를 원하며, παραδεισοs의 기쁨과 환희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타락한 종교로 변질되어 버렸다. 목회자도 이와 같은데 일반 신도들이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쩌면 코로나19는 원시적 목적성을 상실한 교회에게 주는 하느님의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보내진 교회는 가장 심한 악취를 내뿜으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쾌감을 주는 세속적인 영리를 추구하는 종교 기구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생명의 길보다는 세상의 부를 추구했으며, 부자를 우대하며 빈자를 천대했다.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외칠 수 있단 말인가? 순진한 교인들이 부족한 와중에도 자기 생활비를 아껴가며 낸 헌금이 교회 목회자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사용되는 매 순간마다 예수께서는 또 다른 십자가 고통에 눈물 흘리고 계셨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빈자와 똑같은 자리에 놓으셨다. 교회는 파산을 선고 당하고 경매에 붙여졌으며, 목회자들은 세인에게 치욕과 능욕을 당하며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한국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최근 한국 교회에 보이는 몇몇 긍정적인 변화는 우리 마음을 고무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와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왜 코로나19 이전에는 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을까?
코로나19를 통해 한국 교회가 생명력과 운동성을 회복하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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