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이란 진실로 막막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구한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질 즈음에, 조선인들이 불교적 내세관과 하나님 나라를 혼동하였으며, 이 때문에 하나님 나라 사상이 내포하는 종말론적 메시지는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 나라와 민간신앙의 극락을 같은 뜻으로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단코 극락이 아니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어떤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다. 따라서 본고에서 필자는 신약성서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서술적 전환 및 그 연유에 대해 인문학적 고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어로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라 한다. βασιλεια는 전제군주를 뜻하는 βασιλεύς와 영역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후미 -ια의 합성어다. 본시 βασιλεύς는 군대의 통솔자를 뜻하였으나, 고전시대에 접어들면서 군주를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βασιλεύς의 정치적 기능과 민주정을 대체할 수 있는 전제적 정치로 발전할 가능성을 주의한 학자들이 등장했는데, 예로 들어 피타고라스 학파에 속하는 타란토의 아르키타스는 βασιλεύς를 철인왕이자 “살아있는 법”이라 주장한 바 있다. 이어 페르시아 전쟁기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왕중왕을 βασιλεύς라 불렀는데, 이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전기의 키루스2세, 캄비세스2세, 다리우스1세, 크세르크세스1세 등 통치자들이 본인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민족에 대한 정복전쟁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리스인들은 βασιλεια가 두 가지 속성을 가진다 여겼다. 첫째, βασιλεια는 그 자체로서 법인 βασιλεύς라는 철인왕에 의해 통치된다. βασιλεύς는 군대의 통치자요, 그 자체로서 법인 동방의 전제군주가 모티브로 강하게 추정되나, 아르키타스는 이상적인 전제군주에 의한 통치만이 이상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길이라 믿었다. 당연히 이 같은 아르키타스의 국가론은 풀라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아니면 플라톤의 철인왕이 아르키타스에게 영향을 미쳤거나- 적어도 헬레니즘 시대의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있어 βασιλεύς와 철인왕이 동의어나 다를 바 없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둘째, βασιλεια는 확장성을 가진다. βασιλεύς에 이미 군사적 지도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βασιλεύς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왕중왕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βασιλεια는 팽창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과의 전쟁도 불사하면서 영역을 확대하려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플라톤주의자들에게 βασιλεια가 철인왕의 전제군주정을 뜻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이상적인 통치가 무력을 수반해서라도 전세계로 확장됨이 당연하다 생각하였던 것 같다.
당연히 이 같은 βασιλεια는 역사적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유대인들과 크세노폰에 의해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서술된 키루스2세의 페르시아 제국이다. 물론 키루스2세가 진정으로 철인왕에 근접한 지도자였는지에 대해 이설이 존재할 수 있으며, 같은 그리스인이지만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의 저서에 나오는 키루스2세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사람이다(전자의 서술에서 폭군이라면 후자의 서술에서는 마키아벨리적 지도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키루스 2세가 이상적인 통치자에 근접한 군주였음을 부인할 사가는 많지 않았다. 플라톤주의자들은 키루스2세를 보고 철인왕에 대한 신념을 가졌으며, 유대인들은 그를 보고 메시아 신앙을 확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는 유대교에서 파생된 개념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는 오히려 그리스 플라톤주의에서 생성되고, 헬레니즘 시기에 유대인들이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전통적인 이상국가에 대한 서술은 존재한다. 〈이사야서〉 11:1-9에 기록된 이상국가에 대한 서술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여기서 선지자는 인간과 동물이 화목하게 공존하며, 정의가 살아나는 국가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이상국가관은 신약 시대 유대인들에게 제한적인 영향만을 주었는데, 이는 헬레니즘 시대에 플라톤주의의 전래와 함께 철인왕론이 유대인 식자층에게 점차 받아들여졌으며, 이 같은 이상적 국가론이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유대교 전통적 가치관과 혼합되어 새로운 국가관이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저서 〈모세의 일생〉에서 모세는 플라톤주의의 철인왕에 부합하는 이상적 통치자로 묘사되었다. 필로는 고상한 인격을 가진 철인왕만이 하나님의 뜻에 부한한 법령을 제정할 수 있다 믿었으며, 모세를 “왕이자 철학가”요, “왕은 살아있는 법이며, 법은 공정의 왕”이라고 서술했는데, 이는 필로가 상술한 철인왕 βασιλεύς적 형상을 모세에게 투영했음을 쉽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필로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법령을 내리기보다는 권면했음을 강조했는데, 이는 법령을 받아들이는 대상이 노예가 아니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필로의 저술에서 모세는 왕이자, 선지자, 제사장, 입법자라 서술되었는데, 이는 훗날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문학적 서술과 거의 일치된다. 물론 양자가 플라톤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신학 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다 보니 유사한 주장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필로의 중기 플라톤주의적 유대교가 사도 바울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가장 오래된 신약성서인 바울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육신의 음욕을 좇는 행위는 하나님의 나라와 대척점에 서 있다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9-21절을 살펴보자.
육정이 빚어 내는 일은 명백합니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경고한 바 있지만 지금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단순히 악한 행동에 대한 경고로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보이는 플라톤주의적 요소로 보아, 이는 정신적인 것에 반하는 본능적 욕구가 표출되는 행위들을 나열한 것이며,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도 바울은 정신적인 것에 반하는 이런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욕구는 하나님의 나라와 대척점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동일한 기록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보다 집필연대가 조금 늦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6장 9-10절에도 나온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남성 동성애 풍습을 거론하는데,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풍습이 결국 정신적인 것에 반하는 행위이기에 생산 이외의 성행위를 일체 금하고 있으며, 이는 플라톤 이래의 철학에서 주장하는 바와 일치한다 볼 수 있다. 이 같은 사도 바울의 사상은 필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추정된다. 필로는 〈모세의 일생〉에서 모세가 이집트 파라오의 궁전에 있을 때부터 “영적인 목적을 위해 살았으며”, 화려한 삶을 경시하고, 고상한 삶을 살았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 같은 인식은 당연히 플라톤의 영향의 산물일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 같은 주장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듯한데, 가필 서신인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동일한 내용이 등장한다.
추잡한 말과 어리석은 이야기나 점잖지 못한 농담 따위도 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말입니다.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짓을 하는 자와 탐욕을 부리는 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속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입니다.
이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생각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은 흡사 탁발승에게 적용될 법한 생활규범들을 지키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생활에서의 즐거움을 버리고, 오로지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을 선으로 여겼는데, 특히나 탐욕을 숭배하는 자들을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라 주장했는데, 이로 유추해 보아 바울 그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플라톤의 철인왕론에 뿌리를 두고 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는 무엇인가? 바울 신학을 집대성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4장 17-18절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서술만을 보면 그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 기쁨이 가득한 왕국이라 인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운동성에도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11절에서 유스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유스도라고도 불리는 예수가 또한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이들뿐인데 이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며, 유스도는 이름으로 보건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유대인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 운동은 정의와 평화, 기쁨을 세속에서 구현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와는 달리 공관복음이 집필되던 68-90년대에는 티투스의 유대왕국 멸망에 이어 도미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로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었으며, 여기에 더해 그노시스파의 유행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하여금 자신들의 집단적 기억을 지면에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당연하지만 이들은 주로 “예수어록”과 같은 단편적인 기록들을 개별적인 에피소드 형식으로 재구성하였고, 따라서 이들 복음서의 기록에서 보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유대교 메시아 사상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적어도 복음서에서 보여지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당대에 곧 임할 역사적 단계였다. 〈마르코의 복음서〉 1장 14-15절의 기록을 살펴보자.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같은 책 9장 1절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 세계도 아니요, 정치적인 운동도 아닌 하나님의 법률과 직접적인 통치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Theonomie적 세계의 완성이 아닌, καιρός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말론적 기억이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회자되었던 까닭은 로마당국이 그리스도교에 가했던 실질적 위협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빨리 임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세속에서 어찌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상술한 바를 정리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가진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내세적 개념이 아니요, 지금도 팽창되는 현세적 공간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실존적 결단을 통해 세속에서 구현되며, 이는 사후 세계인 παράδεισος와는 상이한 개념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중국인들의 세계관에서 보이는 속세와 대립하는 신선의 세계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로 구성된 종말론적 공동체(R. 불트만)를 통해 확장되어 간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그 순간, 하나님의 뜻은 세속에서도 관철이 되며, 인간의 역사는 Theonomie을 향해 진일보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전제적 통치를 인정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무오한 철인왕적 성격을 가지는데, 그의 말씀은 진리요, 위배될 수 없는 절대적 법규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진리이자, 그가 이 세상에서 보이신 삶은 우리가 본받을 유일한 법이요, 도덕적 규범이며, 진리 그 자체임을 인정함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나라를 통치할 수 있으며, 바로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타 종교를 배척하는 성격을 자연스레 가지게 된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팽창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인간의 내적 성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가 아닌 거짓된 가치관과 대립되는 개념이며, 이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운동성과 팽창성을 동시에 가진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포교라 함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자를 통해 세속적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감화되고, 더 나아가 본인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바 되어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실존적 결단을 내리는 것을 뜻한다.
넷째, 하나님 나라는 수직적 운동성을 가지고 있다. 이 수직적 운동성이란 세속 역사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P. 틸리히가 말한 바 인간의 역사는 완전한 세계로의 여정이며, 이 같은 이상적 유토피아는 역사적 진보가 이루어지는 무수한 καιρός를 지나 도달할 수 있다. 모세의 이집트 탈출은 그 같은 의미에서 인류 역사의 여정을 보여주는 작은 모형이라 할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또는 예수 그리스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자로서,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 아래 유토피아적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를 보여준다.
따라서 단순한 역외 포교만을 선교로 이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속에서도 확장되며,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이들의 고상한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에 우리가 오지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행위만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여기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고상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면, 우리는 포교는 고사하고 과연 스스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되물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 영혼에 그리스도적 사상을 가진 이들의 선한 행실을 통해 세속에서 구현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은 이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다른 이들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진한 이래 형성된 세속과 유토피아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우리가 벗어나기가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나라를 내세적 이상향으로만 국한할 경우, 하나님 나라는 그 운동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연원과 그 성격에 대해 간단히 분석해 보았다. 하나님 나라는 내세적인 개념이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가 세속에서 구현됨을 뜻하며,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 진다. 선교적 정당성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도덕적이고 고상한 삶을 살려는 자들의 사회-정치적 운동이기도 하다. 이는 육체적 욕망을 거부하고 이성적(그리스인들에게 영적이란 이성적인 행위들을 뜻한다)인 가치에 자신의 삶을 집중하려는 움직임인 것이다. 육체적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만을 충족하는데 그치고,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향하는 자들과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는 삶은 그 자체로서 호소력을 가진다. 이는 모든 인간이 올바른 삶에 대한 동경이 마음 속에 있기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사는 자의 κῆρυγμα는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적 삶을 살지 못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친 들, 그의 말은 영적 권위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누구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영적 권위는 수행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려는 실존적 결단을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증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라 함은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진다. 첫째로는 공동체에 속한 자들의 신심을 굳게 함이요, 둘째로는 이 같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아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돌이키게 하려 함이다. 그리하여 (그리스어적 의미의)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질 때,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 가며, 세계의 역사는 Theonomie적 세계의 궁극적 구현을 향해 발전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2018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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