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탈레반 지도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파키스탄이 갑자기 등판해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탈레반의 정치적 타협을 촉구하고 나섰다.
https://www.yna.co.kr/view/AKR20210814032800077?input=1195m
나는 이 기사를 보면서 몹시 불편함 감정을 느꼈다. 이는 파키스탄이 그간 벌인 정치적 행동을 생각하면 이 정치적 타협 촉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상 파키스탄은 이와 같은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7월 14일 버스 테러 사건에서 중국인 기술자를 공격한 테러 집단은 TTP이며, 이들 배후에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국과 인도 RAW가 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발표 자체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렸다고 생각한다.
https://news.joins.com/article/24108260
https://www.yna.co.kr/view/AKR20210813068400077?input=1195m
비록 베이징 지도부는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파키스탄 탈레반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강력히 추정되는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국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탈레반이 이슬람 신정체제(이슬람 토호국 체제)를 다시 세우는 것에 대해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베이징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이 되기 원하는 것 같지만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자체를 전복시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특히나 파키스탄은 8월 11월 도하에서 열린 미∙중∙러 회담에서 중국 측의 이 같은 의사를 재차 확인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3일 나온 TTP 버스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국과의 연관되어 있다는 발표는 아마도 베이징 지도부를 분노케 할 것이다(우리는 이 사건 발생 당시 붉은 황제와 리커창 총리가 책임 규명을 직접 요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적어도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국이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 행위와 연관 있음이 밝혀진 이상(파키스탄은 이 테러 계획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기획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베이징 지도부는 미국과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에 반대하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있어 파키스탄과의 공조를 이어갈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베이징 지도부는 끝까지 다른 나라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내 개입하는 것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우리는 탈레반의 고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탈레반은 카불강 유역과 하자라족 거주지를 제외한 아프가니스탄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 상황이다. 현재 전황만 놓고 보면 아프가니스탄의 실질적 지배자는 탈레반이지 가니 정부가 아니다. 그러나 헤크마티아르의 카불 공격을 직접 경험했을 탈레반 지도부가 과연 또 한 차례 대규모 인명피해를 내면서까지 카불 점령을 시도할까? 우리는 헤크마티아르가 카불 시민을 학살한 직후, 파슈툰족으로부터 인기가 급속도로 떨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견임을 전제로 말하자면 아마도 탈레반은 마자르-이-샤리프 점령 이후, 카불을 포위하고, 생활용수와 전력 공급을 끊은 다음, 가니 대통령 하야를 조건으로 하는 평화협정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탈레반 또한 카불에서의 대규모 인명 피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곳만은 대규모 살상을 피하려고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탈레반의 마자르-이-샤리프 함락이 코앞인 상황에서 파키스탄의 평화 협정 촉구는 불편하다 못해 언짢다. 차도살인借刀殺人 같기도 하고(파키스탄 정부는 시종일관 자국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 행위의 배후로 가니 정부를 지목해왔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세계의 재차 개입을 막으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하며, 아프가니스탄 신정체제 복귀만은 지지하지 않는 베이징 지도부를 달래려는 행동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탈레반이 과연 파키스탄의 말을 따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탈레반 내부도 들어가보면 결국 이슬람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파슈툰족 출신 무장 단체 수장들의 모임이고, 회의 참석자 모두 카불 유혈 입성을 지지하는 것이 아닌 이상, 카불에서 우리가 우려하는 것만큼의 대규모 인명살상이 일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나 예상해 본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가니 대통령이 하야를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외칠 경우, 탈레반에서도 가니 대통령을 이유 삼아 카불의 유혈 진압을 시도할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의 탈레반 무기 제공설에 대해 나도 들은 적이 있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 이유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이 소문은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다. 교차 검증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확인되지 않는 고로 신빙성이 의심된다.
둘째, 중국과 중앙아시아 국가 사이의 무기 거래를 생각하면 중국제 무기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밀수되는 것이 그리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대량의 무기를 수출했고, 이중에서도 투르크메니스탄은 중국의 주요 무기 수입국 가운데 하나(다섯 손가락 안에 꼭 들어간다)다. 이 나라들에 중국이 무기를 제공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들 모두 구 소련 시대를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들 나라는 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독자 노선을 지향하는데, 중국은 이들의 독자노선 지원을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이 접경국이라는 점이고, 탈레반 공세 당시 인도,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연결하는 자란지, 투르크메니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무역 거점인 세베르간을 먼저 확보한 까닭도 이들 국가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지원하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무역로를 장악하고 통관세를 얻으려 함에 있다. 따라서 중국제 무기는 ①중앙아시아에서 구하지 못할 물건이 아니고, ②투르크메니스탄 국경 수비대와 탈레반 또는 탈레반을 돕는 어떤 집단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어 중국제 무기가 탈레반 수중에 들어갈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관련 인터뷰 내용을 알고 있으며, 일부 중국제 무기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반입됐다는 소문도 들었으나, 그럼에도 이 내용을 다루지 않는 까닭은 틀림없이 중앙아시아 상황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나 극우 전문가들이 보면 이 내용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중국이 탈레반에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식으로 소문을 만들어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러시아제 무기가 중국 신장 지역으로 밀수된다 한들 러시아가 ETIM을 지원한다고는 볼 수 없지 않는가? 고로 이 소문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중국과 탈레반의 관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실상 미국의 대북 제재가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기도 한데, 육지로 연결된 국가들 사이에는 철도와 포장 도로 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물건을 나를 수 있어서 국경 통제를 하더라도 밀수 무역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대륙과 연결되지 못하다 보니 당연히 이런 상황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정부의 국경 통제가 완전히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 같다.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납득할 수 없다 생각하는 이들은 지금 당장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가보라. 그것이 가능한지.
2021년 8월 15일 광복절(한국 시간 10:40), 마자르-이-샤리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카불은 포위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56407&ref=A
현재 미국은 병력을 증파한다고 하지만 전황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과 파키스탄은 탈레반을 위해 시간을 끌어줬고(이들은 도하에서 미국, 러시아에게 개입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탈레반은 이들이 벌어준 시간을 이용해 카불강 유역과 하자라족 거주지를 제외한 전국토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그래도 마자르-이-샤리프가 대도시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보니 정부군이 이곳만은 사수하리라 생각했는데, 도시가 함락되는 과정을 들어보니 바로 그 정부군이 먼저 탈레반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아마도 대세는 탈레반 쪽으로 기울었다고 다들 생각하나 보다.
https://3g.163.com/dy/article/GHC4M7GV0515CG74.html?spss=adap_pc
이런 상황 가운데 탈레반은 13일 이후 전국민에게 아래와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고 한다.
①탈레반이 최근 얻은 성과는 오로지 무력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것. 이 모든 것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협력과 지지를 보내주셨기 때문. 감사하다.
②탈레반은 모든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 명예를 보장할 것이며, 공공시설과 정부기관, 공원, 도로 등 국가 공공재산 안전을 보장할 것.
③탈레반은 20년 동안 외국 군대를 위해 일한 아프가니스탄 정부 공직자, 통번역 등 경력자들이 탈레반을 도와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건설을 위해 일해줄 것을 요청함.
④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하는 외국 외교사절과 외국인 및 외국인 상인들의 안전과 생활을 보장할 것.
⑤탈레반은 개인 재산에는 관심이 없고, 주도를 함락한 다음에 살인과 약탈을 금지하고 여성 인권을 존중할 것.
이 성명이 사실인지 잘 모르겠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전복하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는 의지가 강한 것으로 보인다.
북방 최대 거점인 마자르-이-샤리프가 함락된 이상, 이제 가니 정부 수중에 남은 지역은 (탈레반 집권 시 탄압이 예상되는) 하자라족 거주지(바미얀 등)와 수도권이라 할 수 있는 카불강 유역의 4개 주도, 그리고 수도 카불 밖에 없다. 이제 탈레반은 수도를 포위하고, 전력과 생활용수 공급을 차단할 것이며, 고립무원의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요구할 것이다. 이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카불에서 유혈사태가 생기는 것을 막으려는 마지막 노력이자(탈레반에게 있어 아프가니스탄 정부와의 평화협상은 카불 무혈입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그나마 대규모 인명 피해없이 마무리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다. 나는 가니 정부가 탈레반의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어차피 대세는 기울어졌고,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보다 무기력하고 결집력 약한 정부라는 사실만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더 이상 가니 정부에게 희망을 가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고, 우리는 탈레반과 공존하는 방법을 서서히 배워 나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본다.
2021년 8월 15일 광복절 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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