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카불을 포위한 탈레반에게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하겠다며 사실상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정부 청사 위에 나부낄 탈레반의 흰색 깃발을 상상하며 나는 착잡한 마음을 도무지 숨길 수 없었다.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10815205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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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의 군사적 승리는 스파이크먼 《평화의 지정학》과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이래 미국이 견지한 “반월지대” 진출론의 폐지요, 트럼프 대통령과 일부 극우적 공화당 인사들, 그리고 프리드먼-자이한 계열의 지정학자들이 만든 정치적 패배이자 지정학적 정책 실패다. 또한 탈레반의 승리는 마지막까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공격용 헬기와 탄약을 지원한 인도 모디 정부의 중앙아시아 진출 정책의 실패요,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중국의 중앙아시아 진출 성공이며, 중국-파키스탄 양국의 대對 인도 포위망 완성을 뜻하기도 한다. 이제 수틀레지강에서 티그리스강에 이르는 광활한 “심장지대”의 초원과 사막에서 미 해병대의 그림자를 오랜 시간(어쩌면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다.
미국 중심의 지정학적 세계질서를 설계한 스파이크먼은 그의 저서 《평화의 지정학》에서 세계정부 이론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하나의 초강대국에게 세계 경찰의 임무를 부여해 이 나라로 하여금 모든 나라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게 하자는 구상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전세계인들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치관이 있어야 하고, 이런 가치관의 형성에 앞서 내셔널리즘 사회와 유사한 공동체 의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집력 있는 국제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이다.
1991년 마지막 유럽식 제국인 소련이 해체된 이래, 미국은 스파이크먼이 말한 세계 경찰이 되어 유일 패권국으로서 역할을 다했지만, 이는 미국 중산층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미국인들은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전쟁에 오로지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다. 이런 미국인들의 전쟁 피로감을 읽은 프리드먼-자이한 계열의 지정학자들은 미국이 세계에 개입하지 않아도 이 세계의 패권을 미국이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을 전개하며, 비개입주의 노선을 외치기에 이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세계 패권이 사실상 스파이크먼 이래 키신저, 브레진스키, 스코크로프트 같은 통찰력 있는 인물들에 의해 설계되고 완성됐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설사 미국이 없더라도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철도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중국인들이 “심장지대”를 관통하는 철도와 도로를 만드는 동안, 미국은 “심장지대”와 “반월지대”에서의 자발적 후퇴를 거듭했다.
2016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같은 비개입주의 노선을 충실히 이행했으며, 시리아와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반월지대”에 있는 미군을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사이의 평화협상을 촉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재선을 바라던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정치적 이벤트로 이용하고자 주 아프가니스탄 미군의 성탄절 철군을 지시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당시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군사 전문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무책임한 정치적 행동은 아프가니스탄 철군 계획에 그치지 않고, 이란의 전쟁 영웅 솔레이마니를 드론으로 암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2020년 새로이 대통령에 당선된 바이든 대통령에게 이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5월 철군을 조건으로 하는 평화 협정에는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상황이고, 이란과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유사 이래 최악이었다. 무엇보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정치적 대립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중앙아시아 한 가운데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은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며, 철군을 무마시킬 명분도 없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9.11을 명분 삼아 철군 기간을 5월에서 9월로 늦추는 것뿐이었다.
미군이 95% 정도 철수하자, 탈레반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쿤드자다를 중심으로 뭉친 탈레반은 파키스탄 탈레반(TTP)을 제외한 나머지 조직들을 모두 통합하는데 성공했으며, 일원화된 명령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이들은 점차 도시 주변부에 위치한 농촌에 자신들의 행정거점을 두었으며, 보수적인 농민들의 종교적 열정과 부족주의 감정을 자극해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렇게 아프가니스탄 도시들은 점차 탈레반이 농촌에 둔 행정거점에 포위당하게 됐다. 이와 다르게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는 가니 대통령은 이스마일 칸, 압둘 라시드 도스툼, 아시프 아지미 등 무자헤딘 출신 군벌들과 권력 투쟁을 이어갔으며(특히 가니 대통령과 도스툼의 권력 투쟁은 유명하다), 아프가니스탄 정부 관료들을 국제사회가 주는 지원금을 자신들의 호주머니에 챙겨 넣는데 열중했다. 이들의 탐욕과 무능함에 지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탈레반이 도시로 진격하자 그들에게 성문을 열어주었으며, 자란지, 쿤두즈, 잘랄라바드 등지의 주지사들은 도시를 넘겨주기 바빴다.
탈레반과의 본격적인 내전에 돌입하면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얼마나 허약한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30만 699명에 달하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사실상 1/6 수준(대략 5만 명)이었으며, 가니 대통령을 위해 누구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 헤라트와 마자르-이-샤리프 등 대도시 함락 과정을 살펴보면 항상 정부군 또는 지방 군벌이 먼저 항복하고, 이들과 함께 싸우던 정부군 및 다른 지방 군벌이 이끄는 민병대 또한 뚫린 방어선으로 물밀듯이 몰려오는 탈레반 반군에 저항하지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전쟁 초기 일정 부분 활약한 정부군 특공대는 몇몇 대원들이 탈레반에게 공개 처형당한 이후 사기가 떨어졌으며, 이어진 도시 함락에 자신들의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무엇보다 탈레반에게는 외세인 미국과 그 허수아비인 가니 정부를 몰아내자는 명분이 있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에게는 명분도 싸울 의지도 없었다. 결국 이 거대한 조직은 탈레반에게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자진 해산했다.
외교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대일로” 제안이라는 중앙아시아-인도양 진출 계획을 세운 중국은 예전부터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으며, 이는 아프가니스탄에 친 파키스탄 정부를 세우려는 파키스탄 정부의 의지와 맞아 떨어졌다. 이와 같은 정치적 목표에 따라 이들은 오랜 시간 탈레반과 접촉했으며, 탈레반이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심한다. 탈레반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한 중국인 간첩들이 하카니 네트워크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 중국, 파키스탄과 꾸준히 연락하며 이들의 정치적 요구를 일정 부분 충족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과 파키스탄의 역할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에 빛을 발하게 된다. 국내 극우 지식인들의 예상과 다르게 중국과 파키스탄은 마지막까지 국제사회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전복시키는데 필요한 국제적 환경을 만들어줬다. 이란 또한 과거 하자라족 탄압 때문에 탈레반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솔레이마니를 암살한 미국을 돕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는지, 자신들의 영공을 열어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인도양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는 하늘길은 이란과 파키스탄의 반대로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러시아 또한 중국과의 마찰에 더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할 명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병력을 아무다리야강에 집결시킬 뿐,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무너지는 것을 강 건너 편에서 지켜만 봤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땅에 탈레반이 주축이 된 연합정부를 수립하려는 중국과 파키스탄의 반대로 인해 국제사회는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할 수 있는 마지막 골든 타임을 놓쳤다.
중국과 파키스탄의 암묵적 지지를 등에 엎은 탈레반은 기호지세로 아프가니스탄 도시를 함락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탈레반은 과거와는 다르게 치밀하고 전략적인 군사 작전을 수립한 다음, 이를 실행에 옮긴다. 우선 탈레반은 친 서구적인 인도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도울 수도 있는 차바하르→자란즈→라슈카르가 루트를 집중 공격했다. 자란즈에 무혈 입성함으로써 탈레반은 국제 사회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할 수 있는 마지막 루트를 끊어버렸다. 이어 탈레반은 자신들이 20년 동안 자신들이 구축해 둔 우즈베크족, 타지크족 네트워크를 통해 힌두쿠시 북쪽의 도시들을 차례대로 함락했다. 고대 도시 발흐 맞은편에 있는 마자르-이-샤리프에서 정부군과 민병대는 그들을 상대로 마지막 항전을 벌였지만 이미 북부 모든 도시를 석권한 탈레반을 막을 길은 없었다. 결국 고대 도시의 함락과 함께 탈레반은 힌두쿠시 북쪽 박트리아와 바다흐샨 지역을 모두 석권했다. 이어 탈레반은 힌두쿠시 남쪽에서 파슈툰족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도시들을 점령해 나아갔다. 칸다하르와 라슈카르가 등지에서 몇 차례 총격전이 있었지만, 결국 칸다하르는 함락되었고, 라슈카르가의 정부군 또한 싸울 의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탈레반에게 도시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탈레반은 이제 아사다바드, 잘랄라바드 등 카불강 유역의 도시들을 차례대로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끝내 카불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카불을 포위한 직후, 탈레반은 과거 헤크마티아르의 실수(카불에서의 대규모 인명 피해)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진격을 멈추고 정부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했다. 이미 하자라족 거주지와 카불강 유역의 4개 주도만 남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선택지는 두 개 밖에 없었다. 하나는 결사항전이요, 다른 하나는 탈레반의 뜻대로 정권을 이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울 병력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니 대통령은 결국 탈레반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고, 권력을 과도정부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탈레반은 내전을 종식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됐다.
탈레반이 주축이 된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 수립은 중국이 주도하는 중앙아시아 질서-“호라산 벨트”의 완성이요, 인도와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파키스탄이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베이징은 반미라는 기치로 이란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하나로 묶을 것이고, 더 이상 미군이 자신들을 중앙아시아에서 위협하지 못하게 외교적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와 동시에 중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이어지는 철도와 도로를 건설해 중국제 물건을 이란과 파키스탄, 그리고 동아프리카 제국諸國으로 수출할 것이며, 경제적 이익을 매개로 이들 3개국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나아가 베이징은 아무다리야강 남쪽에 위치한 구 소련국가-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으로 눈길을 돌릴 것이다. 베이징은 러시아-소련 강점기에 대한 이들의 내셔널리즘 정서를 자극할 것이며, 무기 수출과 인프라 건설, 차관 지원 등을 통해 아무다리야강에서 인도양 북쪽에 이르는 호라산 지역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할 것이다.
무엇보다 탈레반의 재집권으로 인도 모디 총리의 중앙아시아 진출 계획은 사실상 폐기처분되야 할 것이다. 중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경계하던 인도 정부는 2017년 이란 정부로부터 차바하르 항을 빌리고, 이 일대를 기점으로 중앙아시아 경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자란지와 차바하르를 연결하는 철도를 통해 인도로 수출되면서 모디 총리의 구상은 점차 현실로 이루어져 갔다. 이와 같은 모디 총리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국 견제 구상과도 맞아 떨어져 워싱턴의 지지를 얻게 됐으며, 모디 총리는 곧바로 내륙 지대를 관통하는 파이프라인 건설을 통해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를 인도까지 끌고 온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획은 탈레반의 재집권 때문에 수포로 돌아갈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모디 총리, 아프가니스탄 가니 대통령의 삼자 연대는 중국-파키스탄 연대를 긴장하게 하는데 충분했으며,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의 접촉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압박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도 하카니 네트워크와 연관된 중국인 간첩을 잡아들이는 등 이들의 공작에 강하게 대응했을 뿐만 아니라, 발루치스탄 독립운동과 파키스탄 탈레반(TTP)을 비밀리에 지원함으로써 중국과 파키스탄을 격노케 했다. 결국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인도의 모디 총리,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가니 대통령의 삼자연대에 대항하는 또 다른 삼자 연대(중국-파키스탄-탈레반)가 파키스탄을 중심으로 형성됐으며, 이들은 음지, 양지할 것 없이 모디 총리의 중앙아시아 진출에 강하게 반대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전복될 위기에 처하자 모디 총리는 탄약과 공격용 헬기를 제공하는 등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으나, 본격적인 공세 단계에 진입한 탈레반은 제일 먼저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를 연결하는 교통 요지인 자란즈를 함락했고, 이후 모디 총리는 자국민을 철수시키는 것 외에 어떤 군사적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탈레반은 내전 당시 수 차례 인도에게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며, 이제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이 인도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너무도 분명하다(분명 호의는 아닐 것이다).
인도의 중앙아시아 진출 계획의 파산은 사실상 쿼드로 중국을 견제하려 했던 미국의 대중국 정책 또한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쿼드는 말이 거창하지 실상 미국 중심의 서태평양 집단안보체제에 인도를 더한 것이고, 이 때문에 쿼드에서 인도의 역할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 미국은 인도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지지함과 동시에 인도 해군이 남중국해에서 중국에 압력을 가하는데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인도 모디 총리는 이와 같은 미국의 요구에 선뜻 응했다. 그러나 매킨더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도는 아그라를 경계로 중앙아시아-편자브 운송체계와 겐지스강 수로 운송체계로 나뉘는데, 인도와 파키스탄이 나뉘면서 사실상 인도 북부의 전통적 운송체계는 정치적 요인 때문에 모두 파괴된 상황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요인을 극복하고자 모디 총리는 이란 차바하르 항 개발에 매진함과 동시에 아프가니스탄 가니 정부를 후원했던 것인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 수립은 인도가 더 이상 중앙아시아에 진출할 수 없음과 동시에 아무다리야강 남쪽 호라산 지역에서 중국에 대항할 정치 세력이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중국은 이 안정적인 후방을 기초로 자신들의 역량을 인도차이나와 타이완 해협에 쏟을 것이고, 우리는 과거 상상도 하지 못할 중국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나아가 중국 중심의 “호라산 벨트”의 형성은 우리의 자원 안보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함을 뜻한다. 우리의 원유 수입은 여전히 중동 의존도가 높은데, “호라산 벨트”의 형성으로 인해 두바이에서 뭄바이에 이르는 인도양 지역은 이제 반미-친중 국가들의 앞바다가 됐으며, 한때 안전의 보증수표 같던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훈장은 이제 다윗의 별과 같은 낙인이 될 위기에 처해있다. 과거 우리는 북한 문제 때문에 중국과 접촉을 했다면, 이제는 안정적인 원유 수급을 위해서라도 베이징과 협력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치 해결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미국 텍사스유 수입량을 늘리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의 원유 공급 루트는 소야해협을 지나아 하는데, 이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해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는 베이징과 최대한 충돌을 피하면서 중동 지역에서 우리가 원하는 원유를 계속 공급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친중 국가라는 비판을 계속 받을 것이며, 종국에 이르러 한미동맹은 파기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두 가지 외에 또 다른 출구전략을 제시할까 하는데, 우리도 말라카 해협까지 독자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지정학적 가치나 국가 미래를 생각해보면 바람직한 일이고, 우리의 정치적 선택지를 더 넓혀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과의 무의미한 대립을 중단하고, 미래 지정학적 대립 구도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국가 역량을 키우는 것이 좋다.
영국의 지정학자 페어그리브는 자신의 저서 《지리와 세계 패권》에서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의 충돌을 연구하면서 해양 국가 연맹인 그리스가 대륙 국가 페르시아를 이길 수 있었던 까닭은 자급자족조차 어려운 본토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해상 무역을 통해 얻어지는 경제력으로 부족분을 채울 뿐만 아니라, 해상을 단순한 교역로가 아닌 전장으로 이해하고, 해상 무역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독점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어쩌면 지금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해양 국가로서의 자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그리고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이 날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또 다른 “광복절”로 기억될 것이다. 이 날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침략자들을 몰아낸 날이요, 외세와 결탁한 부패한 정부 관료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주권을 되찾은 날로 기념될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게 되니, 나는 아래와 같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역사에서 외국인 침략자들로 기억될까? 아니면 그들을 진심으로 도와주려 했던 외국인 친구들로 기억될까?
이 무거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하지 않겠다. 다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내일을 또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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