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중앙아시아 테러 단체들과의 관계는 아래 적어두었으니, 해당 내용만 보고 싶은 자는 구분선 아래부터 읽으면 된다.
지정학 책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지정학에서 세계 패권을 논할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접근성”
이 접근성은 해양세력이 육상세력을 압도할 수 있는 주요 요인이자, 러시아와 중국의 내륙 아시아 개발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세계섬”의 정치적 분열과 국가 간의 전란으로 인해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세계섬”을 관통하는 범세계적 무역로는 재기능을 못하던 때가 많았고, 이와 같은 육상무역로에 대한 보완책으로 등장했던 것이 바로 (위험하지만 전란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해상무역로였다. 그리고 항해술의 발달과 함께 사람들이 보다 많은 식량을 배에 실어 나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기존의 육상무역은 점차 수로와 내해를 이용한 수로 운송 체제로 바뀌었으며, 이는 최종적으로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무역운송체계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해상무역로는 몇몇 근해 지역 거점만 확보할 수 있다면, 바다로 연결된 전세계 어느 항구라도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안전성과 접근성 면에 있어 육상무역로보다 뛰어났다.
지정학의 창시자나 다를 바 없는 매킨더는 이런 해상세력의 우위가 내륙 아시아를 관통하는 교통 인프라의 건설로 깨질 수 있음을 수차례 경고한 바 있다. 무엇보다 내륙 아시아 초원지대를 모두 점령한 러시아 제국의 남하 과정을 지켜본 그는 영국의 해상우위로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없는 어떤 시점에 도달할 것을 염려했다. 무엇보다 접근성 면에 있어 심장지대를 장악한 세력이 해상 우위를 장악한 세력보다 쉽게 우위를 차지함을 알았던 매킨더는 이 지역을 관통하는 교통 인프라를 건설할 수 있는 수준의 부와 영토를 가진 국가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가니스탄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까닭은 이 지역이 심장지대에서 반월지대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러시아와 같이 내륙지대를 장악한 세력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할 경우, 빠르게 인도양까지 진출할 수 있는데, 이는 해양 패권을 장악한 세력에게 있어 가장 보기 싫은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이 때문에 1873년 영국은 러시아가 페르시아를 도와 헤라트를 공격할 때 군함을 파견했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게 헤라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선전포고도 불사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런데 중국이 이 지역에 세력을 확장하는 방식은 매킨더식 구상(심장지대에서 외부로 팽창하는 방식, 심장지대→반월지대→해양)보다는 스파이크먼식 구상(반월지대를 장악한 다음 바다와 내륙지대로 팽창하는 방식, 반월지대→심장지대/해양)에 더 가깝다. 중국인들은 ①파키스탄과의 전략적 협력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바다로 통하는 주요 항구(인도양 방면의 항구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②심장지대에 건설한 지정학적 요새와 항구를 연결한 다음, ③이 교통로 사이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 구도가 지속될 경우,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최종 승자가 누구더라도 중국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인도, 터키 등 다른 나라들과 달리 유독 아프가니스탄 문제의 평화로운 해결만을 강조하고, 가니 정부와 탈레반의 무력 충돌에 일체 끼어들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 정부 또한 중국과 파키스탄의 사실상의 동맹관계를 의식했는지, 중국정부에게 경제적인 교류 폭 확대만을 요구할 뿐,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한 적은 없다. 달리 말해 중국은 최종 승자와의 협력을 준비만 할 뿐, 특정 세력을 군사적으로 지지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중국이 가장 원하는 시나리오는 아프가니스탄에 연합정부가 만들어지고, 이 연합정부에 탈레반이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파키스탄은 서서히 자국의 지정학적 우위를 이용해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정치적 압박에 대한 대응책으로 인도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탄약을 제공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정부 또한 파키스탄 수도 아슬라마바드 한복판에서 대사 딸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파키스탄 정부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기도 했다. 파키스탄 또한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을 지원한다고 의심하고 있어, 양국 간의 경직 상태는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다만 아프가니스탄의 종족 구성(파슈툰족 40%)과 정치 상황, 그리고 탈레반의 정국 장악력을 생각해보면, 탈레반의 주류 회귀는 기정사실이나 다를 바 없어 이들을 후원자인 파키스탄 정부와의 정치적 대립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인지 잘 모르겠다.
https://www.yna.co.kr/view/AKR20210721083800077?input=1195m
현재 도하에서 열리는 아프가니스탄 평화 협상은 많은 진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합정부 수립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평화협상이 정체된 까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 측과 탈레반 측이 3가지 쟁점에 있어 여전히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①국명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호국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할 것인가?
②아프가니스탄 정부 주도로 연합 정부를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탈레반 주도로 연합정부를 구성할 것인가?
③우선 내전을 멈출 것인가? 아니면 두 가지 사항에 대한 탈레반 측 요구를 받아들인 다음에 내전을 멈출 것인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가니 정부는 과거 무자헤딘 시절 군벌들을 재무장시켜 탈레반의 진격을 막고 있는데, 이와 같은 군사적 조치는 역설적이게도 아프가니스탄 경내에 있는 다른 테러조직의 세력 확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7월 21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에 로켓포 3발이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몇 시간 뒤, 범세계적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IS는 자신들의 소행이라 밝혔다. 미군 철수와 함께 탈레반과 정부군 사이의 내전이 지속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다른 테러단체들이 역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10720098452009?input=1195m
내 생각인데 어쩌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탈레반과 미군의 싸움이 아닌 탈레반이 참여한 아프가니스탄 연합정부 대 미군 철수라는 힘의 공백기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한 군벌과 IS와 같은 테러단체와의 싸움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중앙아시아 테러 단체에 대해서는 아랫글에 간략하게 소개했다.
https://letrleter.tistory.com/m/96
국내 기자들에 의해 “이슬람 형제”라 일컬어지는 테러리즘의 계보를 살펴보면 우리는 최근 들어 ETIM 활동이 왜 줄어들고 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대체로 중국 정부는 파키스탄 정부와 사실상의 동맹 관계 유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중국 정부의 지지를 등에 엎은 파키스탄은 자국 영향력 확대를 위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무자헤딘 시절 자신들과 함께 싸운 알카에다를 보호한 바 있으며, 9.11 당시 빈 라덴의 신병 인도를 거부하는 바람에 미국과 전쟁까지 치러야만 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관계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고는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후진타오 집권기만 해도 알카에다는 중국에 대한 지하드 선포와 함께 ETIM 지원했으며, (알카에다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도 ETIM 활동을 지지하는 편이었지만, 탈레반과 중국과의 접촉이 증가하는 시점(2014년)부터 이상하게 ETIM의 활동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실제 활동도 하지 않는 ETIM의 테러단체 지원 해제를 요구했지만 중국에서는 극구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물론 미국 측 해제 요구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지만).
물론 아프가니스탄 정부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파키스탄 정부의 탈레반 지원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을 몰래 지원한 바 있으며, 이 때문에 파키스탄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아울러 IS는 아프가니스탄의 몇몇 알카에다 조직뿐만 아니라, 페르가나 지역의 “이슬람운동”까지 자신들의 세력에 포함시키면서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데, 이는 페르가나 분리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우즈베키스탄 정부에게 있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최근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러시아, 타지키스탄과의 군사 훈련을 같이 하는 까닭도 탈레반의 테러리즘 수출보다는 아프가니스탄 내전 장기화로 인한 또 다른 테러 단체인 IS의 세력 확대, 그리고 이들과 연동된 페르가나 지역 “이슬람운동”의 성장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더 강한 것 같다.
따라서 테러리즘과 각국 정부와의 관계를 그려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급하게 정리한 내용이라 틀릴 수도 있다).
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테러리즘 내부가 생각보다 분열되어 있고, 중국에 대한 태도 또한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이다 보니, 이들이 중국과의 대립을 원하지 않으면, 결국 이들과 연동된 다른 테러 단체들의 ETIM 지원 또한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구조상 그리 될 수밖에 없다). 이 구조를 타파하는 방법은 하나뿐인데, 바로 브레진스키의 무자헤딘 지원과 같이 미 정부가 테러 단체의 자금줄과 무기 제공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자헤딘을 지원했다가 9.11이라는 국가적 재앙을 경험한 미국이 과연 테러 단체를 지원할까? 내 생각인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테러조직 중에서 ETIM을 지원할 세력은 ①과거 이들에게 무기와 테러 자금, 군사훈련을 제공한 바 있는 알카에다와 ②반중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파키스탄 탈레반 밖에 없다. 파키스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알카에다와 독자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나마 ETIM 지원이 가능한 테러 단체는 이들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파키스탄 탈레반의 경우, 위구르족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몇몇 위구르족 출신의 파키스탄 탈레반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다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붙잡혀 중국으로 이송된 적도 있다. 그러나 2015년을 기점으로 IS의 발흥과 함께 중동 지역 알카에다는 거의 와해직전 상황이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보호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파키스탄 탈레반 또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으로부터 분리된 이후, 파키스탄 정부와 외로운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어서(심지어 파키스탄 정부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탈레반 계열 테러집단-아프가니스탄 탈레반, 하카니 네트워크-을 지원하고 있다) 이들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설령 파키스탄 탈레반이 중국을 자극하는 행동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중국정부가 (자신들의 적인) 파키스탄 정부를 지원하기 때문이지, 이들이 ETIM의 대의에 호응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이 테러리즘의 산실이 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몇몇 테러 단체만을 지원할 뿐, 자신들에 반하는 IS와 같은 테러 단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강도 높은 탄압 정책을 실시할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우리는 권력의 속성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명 태조 주원장은 건국 과정에서 마니교의 분파인 명교 단체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맨 처음 한 일이 백련교, 명교와 같은 종교 결사단체 탄압이었다. 탈레반은 중앙집권화를 이룬 세력이고, 이런 세력은 자국 영내에 또 다른 분리주의 세력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여러 정황을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아프가니스탄에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①탈레반 중심의 아프가니스탄 연합정부 수립과 ②탈레반과 IS와 같은 탈레반에 반하는 테러조직과의 싸움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정국 불안정과 탈레반 주도 연합정부에 대한 군사∙경제적 지원을 매개로 중국과 파키스탄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심장지대”로 확장하려 할 것이다.
https://letrleter.tistory.com/m/92
근 3개월 동안, 우리나라 기자들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ETIM 관계에 대한 소설 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 생각인데 아마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파키스탄 탈레반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떤 연구자가 “탈레반은 다 같은 탈레반이겠지”라는 억측을 토대로 쓴 글을 몇몇 기자가 참고한 다음, 와한회랑과 중국이 인접해 있다는 단편적인 정보 하나만 가지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ETIM을 지원할 것”이라고 소설 쓴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테러리즘의 계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심지어 나는 상술한 내용에서 하카니 네크워크를 다루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이들의 이해관계도 다르다. 아울러 중국에 반하는 테러리즘 단체들은 반 파키스탄 성향도 있기에(오히려 파키스탄에 반대하기 때문에 중국에 반하는 경우도 있다), 왜 이들이 중국이나 파키스탄에 반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처럼 상상력만 앞세워 다른 나라 망하라고 기우제 지내는 것은 언론의 정도正道도 아니요, 우리의 무지만 드러내는 꼴이다. 부디 공상과학 소설은 네이버 웹소설에 연재하시고, 기사로 쓰는 것은 자제하시길 바라며 이 글을 끝 맺는다.
※ 2021년 7월 23일, 후반부 테러리즘 관련 내용을 추가하고, 제목을 “도하 쳥화협정과 아프가니스탄의 지정학적 가치, 그리고 중앙아시아 테러리즘의 계보에 대해”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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