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주도하는 연횡連橫식 국제질서인 “호라산 벨트”의 형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뜻한다. 이 도전은 우리가 기존의 미국과의 동맹관계로 해결될 수 있다 믿던 원유 수입루트가 경유하는 해역에 중국의 영향력이 강력해짐을 뜻한다. 원래 파키스탄과 이란은 하나의 국제질서 속에 편입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파키스탄 군부가 지지하는 파슈툰 부족주의 세력인 탈레반과 이란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하자라족 사이의 인종적 충돌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 사이에 어떤 연대가 형성될 만한 정치적 이슈가 그간 없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다자 협력의 틀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란과 25년 전략협정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권을 테헤란까지 확장했다. 이어 중국은 러시아의 재차 남하를 두려워하는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자노선을 지지하며, 이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국 무기를 대량 수출함으로써 이들이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중앙아시아와 이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까지 확장하고 있다(그만큼 중국-이란 25년 전략협정의 의의가 크다). 실상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강압적인 것이기보다는 외부 변수로 인한 정치적 변화를 두려워하는 중앙아시아 각국 정부를 지원함으로써 이들 정부의 환심을 사고, 나아가 석유, 천연가스 등 전략자원을 자국까지 안전하게 수입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제 중국인들은 카스피해 남부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해상 고속도로를 타고) 악타우까지 운반한 다음, 다시 이곳에서 중국-카자흐스탄 파이프라인을 통해 중국까지 운반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의 대 이란 제재를 피하는 이 무역로가 개척된 그해(2019년), “말라카 딜레마”는 중국의 공식 문서에서 사라지게 됐다(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중국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는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건설할지도 모른다). 혹자는 일대일로의 정치적 성과라 하는데 중앙아시아 파이프라인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와 같은 주장이 얼마나 비非전문적 발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중국-카자흐스탄 석유 파이프라인이 개통된 이래, 중국인들은 이와 같은 정책을 일관되게 실행해왔다.
따라서 “호라산 벨트”는 아래와 같은 국제정세에 의해 만들어진 지정학 벨트라 할 수 있다.
①중국과 파키스탄의 사실상 동맹관계(유사한 관계로는 북∙중 관계, 중국-미얀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대체로 반미
②중국∙이란 25년 전략협정 →강력한 반미
③중국∙파키스탄의 대 아프가니스탄 영향력 →강력한 반미
④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의 민족주의 독자노선에 대한 중국의 정치∙군사적 지지 →러시아의 세력 확장 경계(내륙국가라 미국과의 접점이 거의 없음).
“호라산 벨트”의 완성은 새뮤얼 헌틴텅이 《문명의 충돌》에서 예언한 “중화문명과 이슬람문명의 동맹”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뜻하며, 동아시아에 위치한 서태평양 집단안보체제에 속하는 한국, 일본, 필리핀 등 구성원들이 새로운 지정학적 요인에 따른 안보 위기에 직면할 수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여전히 대량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페르시아만으로부터 수입하는데, 이란과 파키스탄의 지리적 위치는 우리의 원류 수입 루트를 충분히 위협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JCPOA 무산 과정에서 깊어진 미국과 이란∙파키스탄 간間의 정치적 갈등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 가운데 하나인 우리나라로 하여금 전례 없는 원유 수송 위기에 직면하게 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우리 군대의 개혁을 막는 적폐 세력은 다름 아닌 구시대적인 안보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내 군사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북한과의 싸움만을 염두에 둘 뿐, 안보의 지평을 사이버, 자원 등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을 꺼리며, 미국이 우리의 원유 수송로를 보호해 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빠져 있다. 그러나 미 해군의 해외 병력 배치 상황을 살펴보면 우리는 미 해군의 보호만을 믿고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 디에고 가르시아에서 필리핀 수빅만에 이르는 인도양-남중국해 해역에는 독자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한 규모의 미군이 배치되어 있지 않다. 기껏해야 태국과 싱가포르에 백명 단위의 소규모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의 주둔 목적도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상징성에 더 가깝다고 이해하는 편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이 거대한 해역에 중국은 과다르항, 차우크퓨항, 콜롬보항, 함반토타항 등 항구 도시 개발에 착수했다. 사실상 항만 도시 건설 현황과 항만에 대한 소유권 내지는 이용권을 생각해보면, “힘의 공백지대”에서 중국의 해상세력이 미국을 뛰어넘거나 미국과 비등해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 같다.
물론 이 글의 내용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은 분명 오랜 시간 해상 최강자의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 다만 현재 미군의 해상능력으로 일시에 중∙러 군사협력체 제국諸國 해군을 상대하기란 어렵다. 비非군사적 요인 때문에 무기 개발이 정체되거나 취소되는 미국과 달리 중국인들은 빠른 속도로 미국을 추격하고 있으며, 펜타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훗날 “힘의 공백지대” 해역의 안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①중∙러 군사협력체의 형성과 ②중국의 중앙아시아 관통 교통 인프라 건설(2024년이면 2단계 건설이 마무리된다)로 인해 중국이 자신들이 원하는 지대공∙지대함 미사일 체계를 인도양 원유 수송로 인근 “림랜드(Rimland)” 지역에 배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우리가 단순히 미 해군과 중국 해군의 해상 전투만을 가정해도 됐다면, 이제 우리는 미 해군과 중∙러 군사협력체 제국 해군, 그리고 인근 이란, 파키스탄, 스리랑카, 미얀마 등지에 배치된 지대공∙지대함 미사일 체계까지도 전쟁 시나리오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는 달리 말해 미국이 승리하더라도 예전과 달리 승리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큰 폭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적인 해상능력이 없는 서태평양 집단안보체제 국가들의 미래는 너무도 뻔하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다.
①중∙러 군사협력체의 보호를 받는 위성국이 된다.
②중국, 러시아와 함대함 대결을 펼칠 수 있는 해상 전력을 가진 일본과도 군사동맹을 채결하고, 이들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
③우리 스스로 독자적인 해상능력을 키우고, 유사시 말라카 해협과 스리랑카 앞바다까지 군사적 개입이 가능한 대양 해군을 건설한다(내가 희망하는 한국의 미래).
애국심 투철한 독자들은 당연 독자적인 해상능력을 키우는 계획을 지지하겠지만(실은 애국심과 무관하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③을 지지할 것이다), 올해 초 경형 항공모함 건조와 관련된 논쟁만 살펴보자. 경형 항공모함 하나 건설하는 것도 “미국에 대한 불신”이라니, “동맹 체제에 대한 무지”라니, “미 해군의 강력함을 네가 아는가”라면서 비판을 가하는 우리 국내 군사 전문가들이 동아시아 국가의 경제 성장 및 중∙러 군사협력체의 등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국제질서 변화를 인지하고, 나아가 해군 위주의 국군 건설 계획에 찬성하겠는가? 나는 이들이 물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다가오는 미래의 도전에 대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강함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과연 중∙러 군사협력체 제국 해군을 일시에 상대할 만한 해군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미 해군 혼자서 중국 해군과 인근 대륙에 배치될 지대공, 지대함 미사일 체계 및 공군 전력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만한 전력 유지가 가능한지의 문제다(심지어 접근성에서도 중국의 중앙아시아 관통 인프라 건설로 중∙러 군사협력체가 우위를 차지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군사∙지리적 접근을 하다 보면 우리는 한 가지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현재와 같은 지정학적 대립 구도가 유지될 시, (미래 어느 시점에 이르러) 미 해군이 적시에 충분한 억제력 행사가 가능한 병력을 인도양 지역에 자유롭게 투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수도 있다.”
“호르무즈 딜레마”도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미래 어느 시점에 이르러) 미 해군의 적시 개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원 안보를 보장받을 수 있을까? 일본과의 군사적 동맹도 분명 선택지일 수 있지만, 과거 왜5왕 시절부터 한반도 남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일본이 이런 기회를 놓칠까? 아마도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반도 남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 것인데 말인다. 그리고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일본의 보호국 또는 중∙러 군사협력체의 위성국 전락)를 피하면서 자원 안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①대양해군 건조와 ②해운 능력 강화, 그리고 ③지정학적 중간지대 자임과 ④정치∙사회 개혁을 통한 교두보 국가로서의 성격 회복 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해상역량 강화는 수 차례 강조해도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무엇보다 가까운 미래에 연방제 통일을 하고자 한다면 지금과 같은 해상 수준으로는 중국 내수시장에 빨려 들어갈 뿐, 결코 교두보 국가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강력한 교두보 국가로 성장하고자 한다면 우리 기동함대가 호르무즈 해협과 스리랑카 근해, 그리고 말라카 해협에 일어나는 해상 분쟁에 적극 개입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아시아 대륙 사이의 해상 무역에서 일정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로 성장해야 한다. 이와 같은 거대한 그림을 위해서는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몰디브 등 남중국해-인도양 국가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며, 이 지역의 자원 개발을 통해 우리가 산업 성장을 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서 미국, 중국의 영향력 강화를 경계하는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정치적 연대는 우리의 자원 안전 확보와 더불어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작게는 군사 편제 개편부터 크게는 우리 국민의 사유 방식까지 바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대략적인 방향성까지는 생각해 본 적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체로 생각해 보면 ①일본 해상자위대의 8∙8함대 비견할 수 있는 기동함대를 건설하며, ②해운 역량을 300만 TEU(전세계 선복량의 10% 정도)까지 증가하고, ③이와 같은 개혁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질 경제구조를 지탱할 수 있는 정치제도 개혁과 ④사회 개방성 확대, 이민자 정착 간소화 등 열린 사회 건설을 위한 일관된 정책 수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이들을 차별없이 대하며, 기독교도와 무슬림, 불교도가 공존할 수 있는 거대한 사상적 용광로를 지향하고, 이 개방성과 관용성, 포용력이 만들어내는 창조력과 진취성을 바탕으로 보다 새로운 열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한 육상세력(중국, 러시아, 이란 등 “심장지대” 세력)과 해상세력(미국, EU, 일본 등)의 교두보가 되어 이 세상에 새로운 열린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나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성공은 남만주 지역에 “레벤스라움”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내셔널리즘에 취한 파쇼체제를 건설하는 것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도 해양문명과 민주주의에 기반한 열린 사회 건설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시아 대륙의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정치적 개혁의 등불이 되어 이들 국가들의 점진적인 정치∙사회 개혁을 유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사적 사명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날이 올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희망을 걸어본다. 그날이 올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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