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혹자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예시로 들며 북한도 중국과 같은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 발전을 할 수 있으리라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을 무엇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편의상 “개방론자”들이라 하자. 이들은 중국 개혁개방 초기 주하이, 선전, 산터우, 샤먼을 개방한 것과 같이 북한도 나진 선봉 지구를 개방하면 중국과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야말로 견유공담犬儒空談이요, 내셔널리즘에 빠진 나머지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사회의 경제 구조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중국도 했으니 북한도 가능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란 나라는 자본유동공제형 사회주의 국가다. 이들은 시장의 자율성을 용인하는 대신 정부가 자본의 유동에 깊이 개입하여 시장의 전반적 흐름을 이끌어 나가는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는 거대 자본 규모를 자랑하는 국유 은행을 바탕으로 시장의 대체적 흐름을 주도한다. 그러나 중국이 처음부터 자본유동공제형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둥베이 지역을 벗어나면 공업 지대라 할 만한 곳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과 같이 전국적인 유통망을 실현할 수 있는 교통 인프라망 건설도 완성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 공산당의 토지개혁과 지주계급 타파 과정에서 우수한 농사꾼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당의 무분별한 식량 강제 징수는 농촌에서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과거 우리가 소련에서 보듯이) 농민들은 그나마 양식이 배급되던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한 마오는 1956년 《10대 관계》라는 글을 발표해 중국의 “탈중앙화” 개혁을 시도했다. 농업 부문에서 중국 정부는 4천만 명에 달하는 기아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량구매 작업 계획의 빠른 이행 및 농민 생산 정서 안정을 목표로 하는 중공중앙, 국무원 긴급지시(1957년)》를 발표했는데, 이 조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다. ①향급 행정단위를 기반으로 식량 생산량을 지정한다. ②만약 지정한 생산량을 초과할 시, 정부는 초과분의 40%만을 구매하며, 60%는 생산지에서 소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함께 공업 부분에서도 마오의 “탈중앙화” 개혁은 계속되었다. “허군공화虛君共和”라는 구호 아래, 1958년 마오는 중국 전역의 88%(이중 탈중앙화 비율이 가장 높은 산업부문은 경공업 96.2%, 방직업 100%, 화학공업 91%로 농업 생산과 경공업 분야에 집중되었다)에 해당하는 공장의 관할권과 재산권, 계획권을 지방정부에 귀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는 기업을 수를 계속 줄여 나갔다. 결국 중국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할하는 기업체 수는 1957년 39.7%에서 1958년 13.8%로 줄어들었으며, 70년대에 이르러 이 비율은 6%까지 하락했다.
마오의 이와 같은 개혁은 일부 중국인들에게 있어 재앙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식량 생산량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준에 미달하는 지역의 경우 기아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경제의 대략적인 틀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어 주목할 만하다. ①지방 최소 행정단위인 향을 단위로 하는 독자적인 경제구조가 완성되었다. 마오는 이를 “麻雀雖小 五臟俱全”이라 비유하였다. ②지방정부의 중앙 의존도는 상당히 낮아졌다. 반대로 말해 이 시대관료들이 직면한 경제 문제 대부분이 바로 자신들의 생산량으로 관할구역 수요를 채울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③전국적인 물류망은 파괴되었으며, 중국 지방정부는 향진기업의 발전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경제구조는 분명 생산과 유통, 배급을 중앙정부에서 총괄하는 소련의 중앙집권적 경제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의 경우, (레닌의 구상에 따라) 모스크바 중앙정부에서 모든 전국 수요를 파악한 다음, 경제 계획을 통해 지방정부의 생산 할당량을 발표했다. 지방은 오로지 중앙이 지정한 물품만을 생산해야만 했으며, 이는 지방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농촌 또는 소규모 촌락으로 하여금 상품이 재분배되는 도시 내지는 지방 거점에 기형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을 뜻한다. 이는 당시 농경지대가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에 집중된 소련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분명 효과적인 경제 정책이었지만, 인구가 밀집된 동부 지역 대부분이 농사를 지을 수 있던 중국인들은 다른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다. 물론 이를 “실험”이라 치부하기에는 대가가 큰 것 같지만(인구 증가 속도를 식량 생산량이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적어도 개혁개방 직전 중국은 향 단위부터 대체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상황이었으며, 중앙 정부 내지 타지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상당히 낮은 상황이었다. 이런 지방의 상품 수요를 만족하기 위해 (향 정부 관할 아래 있는)촌을 단위로 하는 몇몇 향진기업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애초에 자신들이 소속된 현 정부의 수요를 채워야 했기에 시장 수요를 자발적으로 측정하고 나아가 생산계획까지 도맡아야 했다. 따라서 개혁개방 이전 중국의 경제구조는 향을 최소 단위로 하는 정사각형 블록이 직육면체 형태로 싸여 있을 뿐,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형태로 경제가 운영되었으며, 당연 할당량 미달에 대한 책임도 지방정부가 지는 구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표1: 소련식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경제와 마오의 허군공화적 지방자립형 사회주의 경제
따라서 우리는 중국과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소련식 중앙집권적 경제: 소련식 모델에서 지방 물류거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전국에 방사형으로 퍼진 철도망을 따라 배급품을 싣고 지방 물류거점(통상적으로 지방의 행정중심지인 경우가 많다)까지 운반되며, 여기서 물건은 다시금 (지방정부에서 예측한 수요에 따라) 각 지방에 있는 배급소로 보내진다. 이처럼 소련에서 지방 도시는 단순한 거주지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데, 이와 같은 지방도시들은 중앙과 지방에 산재된 농촌과 소규모 거주지를 연결해 줄 뿐만 아니라, 다시금 중앙정부의 계획에 따라 생산된 물건을 주변부로 보내는 역할도 감당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소련은 중국처럼 특정 지역을 따로 때어내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제한된 공간에서만 시장경제를 실험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경제 유기체였기 때문이다.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에서 할당한 목표 생산량을 채우는데 급급했을 뿐, 시장 수요를 측정하고 스스로 생산량을 조정하는 방법을 익힐 기회조차 없었다. 아울러 최소한의 생활용품조차 중앙정부에서 독점하는 유통망을 따라 각지에 배급되는 구조다 보니, 특정 지역을 따로 때어낼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탈퇴를 결정했을 때, 다른 공화국 지도자들도 소련 해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가 당시 소련 밀 생산의 43%, 철강 생산의 60%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탈퇴가 결정된 이상, 소련식 경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②마오식 허군공화적 경제: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기업은 소수일 뿐만 아니라(6%), 향진기업을 지방정부로 하여금 스스로 수요를 측정하고 이 같은 수요에 따라 생산하도록 독려했다. 중앙정부는 대략적인 수치와 발전 방향성만을 제시할 뿐, 향진기업의 생산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의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다른 지역의 생산품까지 끌어들여야 그나마 생활 유지가 가능했던 일부 지역의 경우,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 직면했지만, 대다수 인구 밀집지역의 경우 생필품을 다른 지역에 의존하지 않고, 현縣이라는 최소 단위에서 자급자족하는 경제 구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도시는 소련과 달리 기본적인 행정업무만을 제공했을 뿐, 인근 지역에 물자를 재분배하는 기능까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수요 소비를 자체 생산량으로는 만족할 수 없던 베이징, 톈진, 상하이 등 1선 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지방정부 경제는 중앙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경제체로서 기능했으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은 오로지 마오라는 인물의 카리스마에 의존해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마오의 허군공화적 지방자립형 사회주는 어찌 오늘날과 같은 자본유동공제형 사회주의로 바뀔 수 있었는가? 상술한 내용을 토대로 보면 중국은 중앙과 지방, 그리고 지방과 지방 사이의 경제 관계가 모두 파괴된 상황이었고, 중국공산당은 오로지 정치적인 영향력으로만 전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구역을 따로 때어내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시장경제를 실험한다 해도, (이미 지방정부가 경제적 자립을 이룩한 상황이라) 다른 지역에 미치는 영향력은 극도로 작았다. 오히려 정부는 이런 시장경제를 실험적으로 시도하는 지역의 초과 생산을 유도하고, 이와 같은 초과 생산된 상품을 전국에 유통시켜 소비하는 구조를 만들어 나아갔다. 공산당은 (과거 소련처럼) 전국의 유통망을 장악했으며, 칭다오, 다롄, 광저우 등 항구도시를 거점으로 철도, 고속도로, 수운과 같은 교통 인프라를 매개체로 하는 거대 유통망을 완성할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공산당의 자국의 많은 인구가 경제특구에서 생산한 상품을 충분히 소비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이를 위해 내륙 시장의 구매력을 높이는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아울러 소련과 달리 중국은 교통 인프라 상황이 미비하던 상황이라, 중국공산당은 (전국적 유통망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대외 수출로 벌어들인 돈으로 인프라 건설에 착수했으며, 이는 중국 경제의 또 다른 성장동력이 되어 2010년대까지 중국 경제가 고속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전국적 유통망 건설 및 이에 대한 지배력 강화에 이어 공산당은 각 지역에서 사용되던 배급표를 없애는 대신 일괄되게 화폐를 사용하는 경제체제로 전환을 시작하였다. 중국에서 전국적인 장악력을 가진 유일한 조직이었던 공산당은 톈진의 빅토리아풍 건물이 즐비한 구 조계지 지역부터 지도에 나오지 않는 티베트 산간 마을까지 국영 은행 지점을 설치했으며, 다른 금융기관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벌어들인 돈을 (외국계 은행이 아닌) 국영 은행에 저축하기 시작한다. 중국의 거대 국영은행들은 이런 소시민들이 저축한 돈을 토대로 중국기업의 외국 기업 인수에 필요한 자금 창구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중앙정부 주도하의 구조조정을 탈 없이 진행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이와 같은 수치를 통해 우리는 중국 경제에 대해 몇 가지 잘못된 전제를 깔고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①중국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라서 대다수 기업은 국영기업이다.
중국은 애초에 중앙정부에서 관할하는 국영기업 비중이 50%를 넘은 적이 없다. 가장 높았을 때가 60년대(류샤오치 집권기)인데 이때에도 42.2%에 불과했다. 애초에 중국은 지방정부 산하 국유기업/민간 기업(향진기업→국유/민영기업)이 국가 경제를 주도하고 있었으며, 중앙기업이 국가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
②중국식 개혁개방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실험 가능하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험할 수 없다고 단언하지는 않겠지만, 만일 소련이나 북한처럼 중앙집권적 경제체제가 정착한 나라에서 이 같은 방법을 실험하기란 어렵다. 더군다나 마오식 지방자립형 사회주의는 북한과 같이 농경지가 평안남도, 황해도 등 특정 지역에 집중된 나라에서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북한 대다수 지역은 자립형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한 험준한 산지와 고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 지역의 경제성장은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는데, ①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지대의 생산성을 확기적으로 높이거나 ②북한 지역을 중국과 한국에 개방하는 대신 이들에게 통행세를 거두고, 이 통행세로 북∙중 국경지대 사람들이 중국 상인들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공급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 화폐 가치가 지금처럼 변동성이 강한 화폐로 남기보다는 교환가치가 안정화되야 하며, 못해도 위안화와의 환율이 고정되어야 한다.
③중국공산당은 자국 기업을 강력하게 통제한다.
여기서 “통제”를 어찌 규정할지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일단 소련과 비교했을 때, 중국공산당은 류샤오치 재임기를 제외하고는 기업 경영 부분에 관해서는 시종일관 방임하는 자세를 보였다(물론 중앙기업은 예외다). 물론 시진핑 시대에 접어들면서 금융규제 등을 통해 기업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중국공산당이 소련처럼 기업의 생산, 경영을 관리한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중국정부는 자신들이 추진하려는 발전 방향을 제시한 다음, 보조금과 대출에서의 편의 등을 제공하는 형태로 기업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던 것 같다. 지역 사회 관료들은 정부에서 추진하려는 사업 계획에 대해 자신과 “관시關係”가 있는 사업가들에게 귀띔해 주고, 사업가들은 정부 추진 사업 참여 시 대출과 각종 보조금을 받을 수 있기에 정부 추진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이 같은 방법을 통제라 규정하기보다는 강력하게 유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럼 북한에서 중국식 개혁개방이 가능할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북한 지역을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겠다는 주장은 모두 휴지통에 던져버려야 한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북∙중 국경지대에는 장마당이 들어서 있을 만큼 북한 대다수 지역은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는 달리 말해 평양과 그 인근 공업지대의 생산력으로 북한 경제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 지역에서 가장 경제성이 높은 재령 평야와 대동강 평야, 원산만 일대에는 7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3중 방어선을 구축하며 주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지역의 나진, 선봉 일대를 개발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실상 북한 경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음이 자명한데 말인다. 지금과 같이 남북 대치가 계속되고, 북한이 대규모 병력을 한국 방향에 주둔시켜, 자국에서 가장 경제성이 높은 지역을 군사 요새화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북한 경제의 “부족” 현상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려면 개발특구는 못해도 자급자족이 가능해야 하는데, 북한 지역에서 이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평양과 그 인근지역, 그리고 최근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원산만 일대 뿐이다. 따라서 북한 지역에 개발 특구를 만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진, 선봉이 아닌 ①원산만 일대 또는 ②남포에 마련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국제적 항구 도시는 반드시 심해항深海港이어야 하는데, 두 지역 가운데 여기 해당하는 곳은 원산만 일대 뿐이다.
지도1: 이상적인 북한 지역 개발 상상도
따라서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네가지 원칙에 입각해 정책을 입안해야 한다고 본다.
①북한 경제의 근본적 문제는 생산성 미달로 인한 “부족” 현상이며, 이와 같은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 쪽에서 우선적으로 남북 대치 국면을 끝낼 필요가 있다.
②북한은 중국과 같은 경제개발노선을 지향할 수 없다. 중원 지역에서 나오는 농업 생산량을 기반으로 하는 자급자족형 경제가 북한 지역에서 자리잡는 것은 현 북한 지역의 지리적 특성상 불가능하다. 만일 북한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특정 구역을 지정해 실험적으로 시장경제를 실행하는 것이 아닌 (비록 지역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국적인 개발 청사진을 마련한 다음, 단계별로 개혁을 추진해야 함이 옳다.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원산만 지역을 국제 항구로 선포하고, 중국 선양에서 원산까지 빠른 속도로 화물을 나를 수 있는 철도 노선을 건설한 다음, 경원선을 복구해(실은 송림-서울-원산이 하나의 거대한 물류 삼각형을 이루게 함이 좋다 본다) 원산을 한국과 중국, 북한 3개국 상품이 해외로 수출되는 무역항으로 건설함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국경지대의 병력을 철수시키고, (한국, 중국,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대동강, 재령강 유역의 농지 개발을 통해 식량의 자급자족화를 이루어, 서북한 지역이 다시금 북한지역 경제를 먹여 살리는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비로소 경공업 발전과 중공업 진흥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경공업과 중공업 병진발전은 현실성이 없는 정치적 언사일 뿐이지, 이와 같은 경제적 개발노선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평양과 원산, 남포에 한해 경공업과 농업 발전을 병행할 수도 있다 본다.
③그리고 마오와 같이 북한 정부도 (하다못해) 수출 기업에 한해 정부의 개입 강도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회사 경영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외자 기업도 북한에 투자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④이와 같은 경제 개혁을 위해서는 북한 화폐가 비교적 안정적인 화폐와 일정한 교환치를 유지해야 한다(북한 화폐 자체가 그다지 신뢰성이 있는 화폐가 아니므로). 현제까지는 위안화가 그나마 가장 현실적으로 보인다.
고로 북한 정부가 현재와 같은 대치국면을 유지하는 한, 경제적 “부족” 현상을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 왜냐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①평양과 인근 지역의 생산성을 높이든지, 아니면 ②외국의 투자 유치를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병력 규모를 축소하고, 여기에 투입된 토지와 노동력, 그리고 국가에서 독점하는 기술자 집단을 생산 일선에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의 정치 체제가 이와 같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회의적이다. 결국 북한 지역의 경제 개발은 북한 당국자들이 자신들의 지정학적 한계를 어디까지 인식하는지에 달려있다고 본다.
2019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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