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초한전을 둘러싼 오역과 오독 문제에 대해

계연춘추 2022. 1. 9. 17:26

https://brunch.co.kr/@96cb4860cbd5418/18

초한전을 둘러싼 오역과 오독 문제에 대해

쉬어 가는 글① | 오늘 오전, 이 글을 쓰기 위해 《초한전》을 다시 읽었다. 오늘 읽은 것까지 합하면 이 책을 못해도 3번 이상은 읽은 것 같다. 이 책은 생각보다 일찍 영역본이 나왔다. 1999년, 미

brunch.co.kr




아래는 우리나라에서 초한전과 관련된 사론 내지는 시평이다.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200504/1/BBSMSTR_000000100097/view.do

초한전, 모든 상상·한계 초월… 전통적 전쟁관 뒤집었다

1999년 中 두 현역장교가 집필… 9·11 테러사건 예견 큰 반향 美 육사·해사 정식 교재로 채택, 현재까지 8개 국어 번역 출판 군사적 대립보다 경제전·법률전·사이버전·테러리즘에 초점 1999년 중

kookbang.dema.mil.kr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210705/1/BBSMSTR_000000100002/view.do

미·중 군사작전 경쟁의 양상 : 초한전 vs. 전영역작전

미·중 군사작전 경쟁의 양상 : 초한전 vs. 전영역작전 『KIMS Periscope』 239호(한국해양전략연구소 발행) 지난 3월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개최된 미·중 고위급 회담을 통해 두 강대국이 서로

kookbang.dema.mil.kr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40816560005412?did=NA

미중 '초한전(超限戰)'

미국의 현대 중국 이해에 영향을 미친 책 중 하나가 1999년에 나온 ‘초한전(超限戰)’이다. 영어판은 ‘무제한 전쟁’(unrestricted war)이란 제목에 원저에 없는 ‘미국 파괴를 위한 중국의 마스터

www.hankookilbo.com


https://m.youtube.com/watch?v=q2SqnHVCh5A&feature=youtu.be


아래는 나무위키 항목에 나와있는 초한전 설명이다.


일단 《국방일보》는 아프가니스탄 사태 당시에도 3류 소설을 쓴 (국제 문제에 있어) 신뢰성 바닥인 신문이니 논외로 하고, 《한국일보》 시론조차 국내에서 이 책의 내용을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전영역작전과 초한전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부터가 시론의 저자가 이미 초한전의 뜻을 왜곡하거나 잘못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초한전은 쉽게 말해 군사 작전과 연계가 가능한 비군사영역을 모색하고, 이들 사이에 새로운 조합 가능성에 대해 탐구하며, 종국적으로는 비군사영역에서 활동하는 안보위협을 효율적으로 제거하는 전술을 구사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초超”란 ①군사적 수단을 주된 안보 위협 해결 방법으로 삼되 ②전통적인 군사적 영역을 뛰어넘어 비군사영역과의 조합을 모색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오히려 저자는 독자들이 오해할 것을 염려해 초한전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펀중률偏正律에 대해 설명했으며, 이어지는 글에서도 초한전이 결코 무한전無限戰이 아님을 수차례 이야기했다. 오히려 지금 국내에서 이해하는 초한전은 저자가 책에서 수차례 비판한 무한전에 가깝다.

국내 학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누군가 잘못된 자료를 가지고 와서 약간의 대중적 호응만 얻으면, 그것이 진리인 양 받들어 모시는 데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이해가 학자와 텍스트의 결합이 아닌 대중영합주의적인 선동꾼(이춘근 씨가 대표적인 예다)이 가공한 내용을 자신의 이해범위 안에서 마음대로 해석한 결과물이라는 데 있다. 당연히 텍스트와 독자로서 학자의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 텍스트 해석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무한대로 재생산만 해대니 정상일 리 없고, 설사 지각 있는 자들이 이 같은 해석적 오류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눈초리가 두려운 나머지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된다. 결국 오역과 오해, 오류에 입각한 우리의 잘못된 해석은 또 다른 잘못된 해석을 낳고, 이 같은 잘못된 해석이 《조선일보》 같은 보수언론을 통해 확대되고 재생산되면서 텍스트의 진의는 사라지고, 대중의 광기에 의해 재조직된 파시즘의 괴물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지금 국내에서 초한전과 관련한 대다수 논문들은 사실상 반중을 구호로 하는 우리 시대의 파시즘적 광기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시대적 증거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학계 풍토가 이어진다면 훗날 후세사람들에게 어찌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 우리 안의 파시즘에 대한 반성 없이는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본다.




우리는 한국 학계 일각의 극우화와 파쇼화를 논할 때, 이춘근이라는 익숙한 이름을 접하게 된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학자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대중 선동 스피커를 자임하고 있다. 냉전 시대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는 이 노학자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진영 외에 있는 모든 것을 적그리스도적 세력으로 바라보게 만들었으며, 끝내 선이 승리하리라는 종말론적 신앙은 그를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절벽으로 내몰고 있다.

문제는 이춘근 씨에 의해 와전되거나 곡해된 내용이 비단 초한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자이한의 지정학 주장을 주류 담론인 것처럼 소개한 사람도 이춘근 씨였으며, 김정은이 매스컴에 등장하지 않을 시, 사망설을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공개 석상에 나온 뒤에도 미국 음모론 사이트의 자료까지 가져와서 대역설을 주장한 학자도 이춘근 씨였다. 심지어 그는 중국과 러시아의 밀월관계가 확실시되던 상황 속에서도 러시아가 미국을 따르는 한이 있어도 중국과 손잡지 않으리라 주장했으며, 트럼프의 방역 실패로 그의 낙선이 거의 확실시되던 10월에도 트럼프가 재선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그가 제시한 예측 중에서 맞은 것은 단 하나, 2016년 트럼프 당선 뿐이다.

학자의 생명력은 대중성이 아닌 진실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쯤 해서 나는 이춘근 씨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당신은 학자로서 진실성을 단 한순간이라도 추구한 적이 있냐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