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투란주의의 계승자인 신-유라시아 학파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대립이라는 지정학적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서사구조에서 그들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을 육상세력과 해양세력의 대결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해양세력을 적그리스도적 세력이라 칭함으로써 육상세력의 승리만이 이 세계를 도덕적인 상태로 돌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두긴의 이 같은 지정학 서사에서 미국은 해양세력의 대표주자고, 러시아는 육상세력의 대표주자다. 따라서 러시아의 신성한 임무는 루스와 투르크, 몽골을 조직하여, (로마인들이 카르타고를 파괴한 것 같이) 해양세력을 붕괴시키고, 육상세력이 지배하는 도덕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세계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긴은 이 새로운 러시아 제국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몽골, 중국령 신장을 신-유라시아주의의 이름 아래 합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일본과 이란, 터키, 독일, 프랑스를 우군으로 확보함으로써 앵글로-색슨 제국의 일원화된 세계질서를 타도하고, 새로운 다극주의 세계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https://brunch.co.kr/@96cb4860cbd5418/12
이 같은 신 유라시아 학파의 지정학 담론은 현재 러시아인들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들은 슬라브 민속신앙을 받아들이거나, 신-유라시아 학파의 담론을 수용한 러시아정교회 성직자들의 설교에 감화됨으로써, 적그리스도 세력 미국과의 아마겟돈에서 최후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고 있다. 특히나 이런 사상에 빠진 러시아계 유민들은 미국과의 전쟁을 도덕주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서구 세계와의 군사적 충돌도 불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미 돈바스 반군 가운데 상당수가 이 같은 신-유라시아 학파의 투란주의에 취해 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카자흐스탄과 벨라루스에서도 이들은 빠르게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중산층이거나 고학력자라는데 있다. 특히나 두긴이 지정학 전공을 러시아 모든 대학에 신설하면서 신-유라시아 학파는 러시아 식자층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지지자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들의 숫자에 비해 사회적 영향력이 우리의 생각보다 클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사진 출처: https://www.heritagedaily.com/2020/04/arkaim/127669?amp
이 같은 신 유라시아 학파의 지정학 서사는 러시아의 역사 해석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는데, 아르카임 유적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비록 신-유라시아 학파는 루스와 투르크, 몽골 3개 인종 집단의 연합제국을 꿈꿨지만 막상 이런 연합제국의 역사적·고고학적 실체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아르카임 유적에서 발견되는 복합적인 성격의 문화 양식은 아리아 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에서부터 시작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루스와 몽골, 투르크 모두 하나의 공간적 뿌리(심장지대)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르카임 유적에서 보이는 기하학적 공간 배치와 고도로 요새화된 방어시설은 “이집트·메소포타이마→크레타→미케네”로 이어지는 해양문명의 계보가 아닌 “아르카임→인도·이란어족→캅카스&유목세계→루스”로 이어지는 대륙형 문명의 계보를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증거로 사용될 여지가 충분했으며, 또 실제로도 그리 사용되는 중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러시아인들은 이 유적지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이 도시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4천 년 전 마차와 전사 유골은 이곳 주민들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전차를 만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유물은 분명 아르카임 주민들이 전차부대를 운용했음을 보여주며, 우랄산맥 남단에 생각보다 발달된 도시 문화가 존재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울러 이 같은 원심형 도시가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아나톨리아 등지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문화가 모종의 요인(민족 대이동일수도 있다)에 의해 여러 지역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77001.html
여기까지 보면 중요한 청동기 시대 유적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신-유라시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슬라브 민속신앙론자(Rodnover라 한다)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아르카임이야말로 조로아스터가 태어난 곳이며(물론 아르카임의 도시 형태만 놓고보면 발흐와 비슷하기는 하다), 《아베스타》에 등장하는 신들의 도시이며,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극락원이자, 모든 아리아 문화의 뿌리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보기에 아르카임의 동심형 구조는 이 도시야말로 아틀란티스, 샴발라 전설의 모티브이자, 그들이 그토록 꿈꾸던 고대 도시라는 증거라고 외쳤다. 물론 동심형 구조는 아르카임의 주요 특징이기는 하지만, 이 같은 구조는 발흐에서도 보이고, 타슈켄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등지에서도 보이기에 막연히 동심형 구조만으로 아르카임과 아틀란티스, 샴발라의 연관성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은 이 같은 해석은 과하다 못해 사료적 신빙성 문제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만큼 위험한 추론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루스와 투르크, 몽골의 연맹체를 구상하던 신-유라시아 학파에게 있어 아르카임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들에게는 루스와 투르크, 몽골이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사용될 수 있는 유적지의 존재 자체가 중요했지, 이 도시의 실제 기능과 역사적 의미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이 도시에서 보이는 동심원 구조와 기하학적 배치는 슬라브 민속신앙론자들을 열광시켰으며, 아르카임이 사실상 북극성에게 바쳐진 고대 도시라는 가설까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가설은 대체로 인도의 사상가 Bal Gangadhar Tilak등이 주장한 이론으로 이들에 따르면 아르카임은 원래 북극성 신앙의 성지였는데, 이 지역에 살던 북극성 신앙을 가진 이들이 모종의 원인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스와스티카와 만다라 문양은 바로 북극성 신앙의 흔적이며, 이 같은 신앙은 훗날 태양신 숭배로 대체되기 이전까지 고대인들이 믿던 주요 종교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처럼 신-유라시아 학파는 북극성 신앙에 대한 믿을 수 없는 가설을 가져와 아르카임을 태곳적부터 존재한 북극성 신앙 성지로 둔갑시키고(실상 그런 신앙이 존재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러시아 제국은 바로 이 북극성 신앙을 가진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사실상 두긴과 신-유라시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사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 같은 러시아 지정학자들의 사상을 살펴보면 우리는 아르카임이 두긴의 지정학 서사를 완성시켜주는 중요한 열쇠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도시는 심장지대야말로 아리아 민족의 기원이며, 루스와 투르크, 몽골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기원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러시아의 신-유라시아 학파의 지정학 서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도 이런 러시아의 팽창주의 신앙을 옹호하는 집단이 존재한다. 바로 증산도와 《환단고기》 추종자들이다. 나는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래와 같은 충격적인 동영상을 봤다.
https://youtu.be/bvcFKtfOpew
※ 환국 문명을 계승했단다…….
일단 아르카임의 도시 성격도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저 중앙에 있는 광장도 방형 구조가 아니다. 그리고 저런 도시는 우랄산맥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과 아나톨리아, 시리아 등지의 청동기 유적지에서도 발견되는 흔한 도시 양식이다(당장 저 아르카임 주변부에도 저런 원형 도시 유적은 많다). 오히려 아르카임과 우리나라의 연관성을 설명하려면 한반도 또는 요동 모처에서 저런 유적지가 발견되야 하는데, 내가 아는 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느 때부턴가 《환단고기》 추종자들은 러시아에서 수입한(?) 신-유라시아 학파의 담론을 가져와 《환단고기》 기록을 증명하려 하는데, 이는 《환단고기》의 역사성을 증명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신-유라시아 학파의 담론만을 소개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최근 한국 땅에 이런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옹호하는 신-유라시아 학파의 지정학 서사에 뿌리 둔 극단주의 사상이 《환단고기》 추종자들을 통해 계속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증산도가 훗날 신-유라시아 학파의 첨병이 되어 이 위험한 사상을 한국 땅에 은연중에 전파하고, 더 나아가 러시아의 팽창에 대한 반감을 없애는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의 종교적 의도는 순수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러시아의 팽창을 돕고, 한반도를 신-유라시아 학파의 구상에 따라 중국과 일본, 또는 러시아의 속국(두긴의 지정학 서사에서 한국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거나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해야 하는 나라다)으로 바치는데 앞장서고 있다. 실상 우리 민족의 알타이 기원설은 근거도 빈약할 뿐만 아니라,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런 학설이 어떤 정치적 결과를 도출할지 예측해 본다면 끔찍하다.
물론 이들은 러시아를 이용해 중국을 견제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치겠지만, 중·러 군사협력체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이 같은 추론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알 수 있다. 중국은 자국의 이익 때문에 러시아와 손잡는 것을 선택했지만, 러시아는 자신들이 믿는 지정학적 신앙에 기반해 중국과의 연대를 선택했다. 비록 양국의 연대 이유를 살펴보면 이익과 신앙이라는 한 단어 차이에 불과하지만, 이 차이는 타이완 문제와 우크라이나 문제, 나아가서 미국을 대하는 양국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전자가 금전적 이익과 자존심에 목말라하는 자들이라면, 후자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상대방을 북극성 제단에 제물로 바치겠다는 오컬트 숭배자다. 전자는 그나마 미국과 타협이 가능하겠지만, 후자는 타협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면 된다(오컬트 숭배자라는 점에서 《환단고기》 추종자들과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시간의 문제가 있을 뿐, 러시아는 결국 우크라이나를 합병하려 들 것이다.
원하기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환단고기》를 멀리하고, 믿을 만한 사료와 고고학 자료에 입각한 역사 해석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릇된 애국심만큼 망국을 부르는 길이 없음을 기억하며…….
나는 《환단고기》 추종자들의 동영상도 가끔 보는 편이다. 그리고 몇몇 주장들은 나름대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도 이들이 지금 가는 방향성은 위험하다 못해 러시아 기갑사단을 한반도로 불러들이는 작업에 착수하고 있다. 지금도 길거리에 가보면 《환단고기》 추종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실한 민족 역사를 소유하고 있다며 “한국도 우랄-알타이어계 민족이고, 반-중국 연합을 결성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칠 것이다. 이것이 신-유라시아학파에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그들에게 있어 《환단고기》 추종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한반도 전역을 어서 러시아 제국에 합병해 달라는 “구급 요청” 수준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환단고기》 추종자들의 아래와 같은 주장에 참 공감한다.
“한반도로부터 벗어난 시각을 가져야 한다.”
옳다. 한반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역으로 한번 물어보자. 《환단고기》 추종자들은 진실로 한반도를 벗어난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봤을 때, 이들이야말로 한반도라는 공간적 틀에 사로잡혀 러시아 신-유라시아 학파라는 들여보내서는 안 될 이리를 끌어들이고 있다. 러시아가 진정 한국을 강대국이자 동맹으로 인정하리라 보는가? 두긴이 쓴 지정학 저서만 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한 날 꿈인지 알 수 있다. 두긴과 신-유라시아 학파에게 있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지역은 중국령 신장과 몽골이고, 한국은 자신들이 중국으로부터 신장을 빼앗는 대신 베이징에 주는 보상 차원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간 우리가 그나마 독립을 유지할 수 있던 까닭은 ①인도양 진출에 관심이 많은 중국(이들에게 있어 타이완과 인도차이나, 인도양 진출이 더 급선무다)과 ②서태평양 현상 유지에 치중하는 미국 때문에 그나마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지, 만일 러시아가 (진정으로 《환단고기》 추종자들이 원하는 바와 같이) “동족의 아픔”을 보다 못해 만주와 한반도로 남하할 경우, 베이징은 자국 수도 방어가 달린 지역이라 어쩔 수 없이 한반도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워싱턴 또한 현황 유지를 위해 이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재차 파병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강대국 사이의 각축전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것과 같이) 한반도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좋은 일이겠는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의 남하는 미·중 연대 및 러시아를 끌어들인 당사국의 정권 전복 내지는 국가 해체로 이어졌다(아프가니스탄이 대표적인 예다). 만일 한국을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처럼 4등분 시키고 싶다면 계속 《환단고기》 추종하시고, 신-유라시아 학파와의 연대를 이야기하시라.
무지가 얼마나 그릇된 애국심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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