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https://www.pinterest.com/amp/pin/421860690095293228/
오늘 나는 샴발라(샹그릴라)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 전설적인 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까닭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것은 鬼力亂神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신률적 세계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완성되어가는 것이지, 결코 지상에 있지 않음을 증명하고자 함이다. 물론 샴발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림풍파가 쓴 《지식의 사자》라는 글에 샴발라로 가는 여정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니 이 기록을 토대로 샴발라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이 티베트의 승려는 카슈미르에 도착한 다음 미로처럼 구부러진 산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박시크라는 땅에 도착한다고 한다. 만일 지도를 옆에 두고 이 기록을 이해한다면 여기서 박식크란 박트리아의 수도 박트라(오늘날 발흐)를 뜻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지식의 사자》가 쓰여진 16세기에도 이 도시는 여전히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 나라에 사는 터번을 두른 자들은 또한 이 지역에 거주하는 페르시아계 또는 투르크계 사람이었을 것이다.
박트라에서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면 숲이 있다 하는데, 이 숲을 지나면 시타강이라는 물살이 거친 하천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시타강은 당연 시르다리야강을 뜻하며, 박트라 북쪽의 숲이란 당연 시르다리야 강과 박트라 사이에 위치한 기사르-알라이 산맥의 우거진 산중림山中林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이 수행승은 박트라에서 소그드 지역으로 우회하기보다는 기사르-알라이 산맥을 가로질러 시르다리야 강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시르다리야 강을 넘은 수행승의 눈앞에 나타난 대도시는 다름 아닌 타슈켄트다. 이 타슈켄트는 《구당서∙서역전》에 석국이라 등장하는 곳으로 여색으로도 유명한 지역이다. 두환 《경행기》에 따르면 자지성 주변에는 폴로숲이라는 울창한 숲이 있는데, 아마도 수행승은 필시 자지성에서 폴로숲을 경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폴로숲을 지난 그에게서 나타난 곳은 호수가 있는 땅이라 하는데 아마도 페르가나 분지 가운데에 위치해 있던 물웅덩이와 호수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 사막과 험난한 산, 그리고 모래가루가 부는 땅과 천둥의 들판을 지나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페르가나 분지에서 톈산 산맥을 넘는 여정을 문학적으로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비록 파미르 고원을 넘는 루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가나 분지에서 카슈가르로 통하는 여정은 험난하기로 소문났으며, 험준한 톈산산맥과 사막을 지나야만 했다.
이어 수행승은 자신이 신도 인간도 아닌 자들이 사는 땅에 도착했다 했는데, 이는 필시 고된 여정으로 인해 그가 환각 상태에 빠져 있음을 반영하는 글귀로 보인다. 아마도 그는 톈산산맥을 넘어 카슈가르 또는 야르칸트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나는 야르칸트로 보고 싶다). 여기서 수행승은 탄트라 사상에 빠진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는데, 실제로 중세기 무렵 야르칸트를 지배하던 호탄 왕국은 서역에서도 밀교가 유행하던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이 탄트라 사상에 유행하는 도시에서부터 여행을 즐기라는 것으로 보아 이후의 여정은 지나온 지역에 비해서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마지막에 이르러 눈 덮인 산맥을 넘으면 샴발라의 수도 칼라파에 도달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 소견으로 보아 눈 덮인 산맥은 톈산산맥이요, 칼라파는 오늘날 투르판(구 고창)이다. 카라사르 지역에서 투르판으로 가기에 앞서 톈산 산맥이 보이는데 마침 이 구간도 눈으로 덮여 있다. 이로 보아 수행승은 야르칸트에서 서역남도를 경우해 카라사르에서 투르판까지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왜 나는 고창 위구르를 샴발라의 원형으로 보는가? 일단 샴발라라는 이름 자체가 칸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칸발릭과 유사한 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본다. 물론 이 명칭은 원나라 대도 이외의 도시에게서 사용된 예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발릭”이라는 식의 도시 명칭은 중세기 유목민족들의 도시를 지칭할 때 너무도 자주 사용되었기에 이와 같은 도시 명칭을 사용했던 위구르, 카를루크, 오우즈 등 유목민족들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어 이 샴발라의 왕은 불교는 보호하는 것으로 여러 기록에 나오는데, 실제로 이슬람 세력에 맞서 마니교와 불교를 보호한 유목제국은 오로지 고창-위구르뿐이다. 고창-위구르 군주는 만일 호라산 지역의 지배자가 마니교도 한 명을 죽인다면 무슬림 열명을 죽이겠다는 호전적인 발언으로도 유명한데, 북쪽에 거대한 산맥이 있다는 것과 이 산맥에 석굴이나 사원이 세워져 있다는 점, 계획 도시였다는 점 등 고창과 유사한 면이 너무도 많아 샴발라는 고창을 모티브로 만든 가상의 왕국으로 강하게 추정하는 바다.
그런데 이 고창-위구르는 한때 토번 왕국과도 싸웠는데 갑자기 이들이 이상적인 나라로 묘사된 까닭은 무엇일까? 내 생각이지만 9세기 이후, 비록 위구르는 토번 왕국으로부터 타림 분지를 빼앗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공동의 적 이슬람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간혹 손을 잡기도 했다. 실제로 이슬람 계열 사료를 보면 그들은 토번 왕국과 고창-위구르의 연합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이들이 실제로 이슬람에 맞서 일시적인 군사적 연대를 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고창-위구르 군주의 호전적인 태도와 함께 위구르인들이 점령한 타림분지 일대의 도시 문명 또한 티베트인들에게 전해졌으며, 그들은 이 지역의 발달한 불교 문명을 부러워하고 하나의 이상향으로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고창-위구르의 강압적인 태도를 통해 티베트인들은 세상이 불교 신앙에 대한 배교를 요구하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되려 할 때 고창-위구르 군주가 다시금 군대를 이끌고 나서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생각했고, 이와 같은 전설이 계속 와전되면서 결국 샴발라 전설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전승의 형성은 흡사 프레스터 존 전설의 형성과도 비슷하다. 서요 황제 야율대석이 이슬람 군대를 무찌르자 유럽에서는 동방에 기독교를 믿는 프레스터 존의 왕국이 있다 믿은 것처럼, 티베트인들도 고창-위구르 군주에 의해 이슬람의 동진이 몇 차례 저지당하자, 샴발라 전설을 만들어서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용사가 나타나리라 믿었던 것이다. 즉 샴발라 전설은 처음에는 샴발라라는 이상적인 나라에 대한 묘사보다는 샴발라 군주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에 초점이 맞춰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어느 순간부터 이상적인 왕국으로서의 특징이 더 강조되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샴발라의 원형이었던 고창-위구르는 결국 이슬람으로 개종한 카를루크족이 세운 카라한 왕조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서역 지역의 마니교와 불교 문화 중심지였던 고창 고성은 과학 기술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그래픽 복원조차 불가능한 수준까지 파괴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상향의 실체를 알면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훈묘지명》의 진위 논란에 대해 (0) | 2022.01.19 |
---|---|
라다크-악사이친의 핏빛 노을, 그리고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0) | 2022.01.18 |
초한전을 둘러싼 오역과 오독 문제에 대해 (0) | 2022.01.09 |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이란의 불편한 삼각관계 (0) | 2021.12.25 |
《삼국사기∙고구려본기∙모본왕기》에 나오는 고구려의 상곡, 태원 습격 사건에 대해 (0) | 2021.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