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필자는 지정학 전공자가 아니다. 다만 필자의 학위논문과 연관된 신장 지역이 지정학과 연관 깊다 보니 이 지역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려면 좋든 싫든 지정학을 알아야만 했고, 이 때문에 매킨더, 마한, 하우스호퍼, 스파이크먼, 코헨, 브레진스키, 엥그달, 파커, 프리드먼, 팡용강方永剛, 예즈청葉子成, 원윈차오文雲朝 등 연구자들이 쓴 지정학 책을 몇 권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국내 몇몇 연구자들과 교류하면서 국내의 지정학이 생각보다 발전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정학은 대체로 ①브레진스키의 중앙아시아 블랙홀론, ②프리드먼-자이한 계열의 연구가 대부분인데, 이런 연구들은 대체로 크레시-핸릭슨 계열에 속하기 때문에 유라시아 지역의 정치적 분열의 지속을 전제로 하며, 이는 달리 말해 오늘날처럼 유라시아 대륙이 하나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뭉친 상황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음을 뜻한다.
⁂ 나무위키 지정학 항목의 설명. 이 글쓴이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프리드먼, 자이한 책 몇 권 읽고 지정학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은 중∙러 군사협력체의 등장으로 크레시-핸릭슨 계열의 “행운섬” 이론의 대전제(“세계섬”의 정치적 분열)가 무너진 상황이다. 달리 말해 프리드먼-자이한 이론도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지정학이란 무엇이고, 지정학이 우리의 삶을 어찌 규정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지정학은 지리적 요인이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대체로 지정학 연구는 ①지리적 공간과 ②위치를 중시하는데, 이 두가지가 지정학적 판단을 내릴 때 가장 중요한 기준점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국제관계학과 같이 지정학 또한 지리적인 요인(공간과 위치)이 한 나라에 미칠 영향과 이 같은 지리적 요소가 초래할 정치적 변화를 예측하기도 한다. 코헨의 《지정학: 국제관계에서의 지리학(Geopolitics: The geography of international relations)》에서는 지정학 연구를 크게 3가지 층위로 나눈다.
①지정학적 전략지대(심장지대, 반월지대, 분쇄지대, 행복섬 등)
②지정학적 정치지대(EU, 아세안, 중동, 서태평양 집단안보체제 등)
③민족국가, 자치구, 국가에 준하는 정치세력 통제구역 등
1. 지정학적 전략지대 분석
여기서 “전략지대”란 지정학에서 말하는 ① “심장지대”로 대표되는 육상 세력과 ② “행운섬”으로 대표되는 해상세력 간의 대립이라는 거시적 시각에서 세계 정치를 해석하는 연구행위를 뜻한다. 이는 영국의 걸출한 지정학자 매킨더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러시아가 시베리아 개발을 통해 내륙 지대에 위치한 석유, 천연가스와 같은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며, 나아가 내륙을 관통하는 근대화된 교통 인프라를 통해 인도양, 서태평양 연안지대까지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으리라 봤다. 따라서 그는 세계의 패권국가의 조건을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누군가 동유럽을 지배하면, 그는 “심장지대”를 지배할 수 있다.
누군가 “심장지대”를 지배하면, 그는 “세계섬”을 지배할 수 있다.
누군가 “세계섬”을 지배하면, 그는 전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매킨더의 3단론은 미국의 지정학자 스파이크먼에게 계승됐는데, 스파이크먼은 “심장지대”를 점령한 소련과 중국이 무너질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심장지대”를 지배하는 것만으로는 이들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는 “심장지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한 반월지대를 “림랜드(Rimland)”라 부르며, 이 지역의 지배자만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스파이크먼의 지정학적 주장은 미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련이 깊은데, 이미 “심장지대” 대부분을 소련과 중국이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지정학에서 세계 패권 향방을 결정하는 지역이라 평가받던 동유럽조차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간 상황에서 미국인들은 매킨더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심장지대”보다는 심장지대를 둘러싼 “림랜드” 장악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스파이크먼은 “림랜드”를 매킨더의 “반월지대”보다 더 광활한 지역으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몽골, 중국의 대부분 지역과 아프가니스탄과 호라산을 제외한 이란 등지가 “림랜드”에 들어가게 됐는데, 이 같은 “림랜드” 설정은 당시 정치적 환경과 관련 있다(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은 친서구적 왕정이 지배하고 있었고, 중국은 아직 국민정부 지배 하에 있었다). 따라서 스파이크먼의 “림랜드”는 (매킨더와 달리) 순수한 지리적 조건에서 벗어나 정치적 요소까지 가미된 개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60년대 이르러 미국의 지정학자들은 스파이크먼의 이론에 기초해 냉진 시대 미국을 지배한 “도미노 이론”을 확립한다. 이는 소련이 “심장지대”에서의 우위를 이용해 중국을 점령한 다음, (흡사 도미노 게임과 같이) 중국을 교두보로 삼아 인도차이나와 한국 등지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 하며, 따라서 미국은 반월지대에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통해 소련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도미노 이론”은 이미 60년대부터 파열음이 생기기 시작한 중∙소 대립을 과소평가한 측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미국 케네디 정부와 존슨 정부는 이를 자신들의 외교 정책에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 내전에 개입하는 이론적 토대로 삼았다. 결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의 패전으로 끝났으며, 이 기간 동안 오히려 중국이 베트남 북부를 침공하는 웃지못할 일이 일어났다. “도미노 이론” 또한 미국의 전략적 오판을 불러온 실패한 지정학 이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쓰러질 것 같지 않던 소련이 해체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미국의 지정학자들은 이제 매컨더의 주장을 부인하고, 새로운 지정학 탐구를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냉전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던 까닭을 “세계섬”의 분리에서 그 요인을 찾았으며, 인종적, 지리적 요인 때문에 나누어진 “세계섬”에서는 통일된 정부가 나타날 수 없으며, 반대로 미국은 상대적으로 떨어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강력한 해군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나라 또는 정치세력을 도와 “세계섬”의 질서를 규정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따라서 조지 크레시, 핸릭슨 등 지정학자들은 미국이 위치한 북아메리카는 “세계섬”의 복잡한 정치적 분란에 휩쓸리지 않아도 되는 “행운섬”이며, 오로지 미국만이 세계 질서를 규정할 수 있기에 미국이야 말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브레진스키는 《거대한 체스판》에서 소련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 5개국과 아프가니스탄을 “블랙홀”이라 칭하며, ①아제르바이잔에서 터키를 거쳐 지중해로 연결되거나 ②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양으로 연결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해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일대의 자원을 독점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따를 경우, 미국은 “림랜드” 뿐만 아니라, “심장지대”까지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는 명실공한 세계제국이 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브레진스키의 책이 쓰여진 직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터졌고, 미국은 브레진스키의 주장대로 중앙아시아에 군사기지를 두기 시작했다. 당연 브레진스키의 학설 또한 러시아와 중국에 빠르게 소개되었는데, 당시 중국 군부와 러시아는 미국의 이 같은 대외정책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대응책 마련을 고심했다. 확실한 것은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과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해 2000년대 미국의 지정학 도서들은 빠르게 중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중국 군부 장성들은 이를 읽고 미국의 대외전략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중국의 신장 개발과 관련한 연구서들을 보면 대체로 신장을 개발해야 하는 지정학적 요인과 이 일대의 복잡한 인종 관계를 서술하면서, ①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②러시아에 뿌리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에 무기를 공급하는 전략 노선을 확립하며, ③나아가 자국의 자원 수요 충족을 위해 중앙아시아의 자원을 파이프라인 건설을 통해 중국까지 끌어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 이 같은 중국 측의 전략에 대해 미국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자원 독점을 막을 수 있다 믿었기에) 지지를 표명했으며, 중국인들은 별다른 방해 없이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해 흑해의 석유와 우르타블락의 천연가스를 자국까지 끌어와 사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브레진스키의 예상과 다르게 이란이 미국과의 경제 협력을 시종일관 거부하면서 미국과 터키가 추진하던 아제르바이잔-터키 경유 파이프라인 공사는 기약 없는 사업이 되어버렸고, 러시아 또한 자금난 때문에 중앙아시아와 자국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 건설에 착수하지 못하자, 이 일대의 전략 자원은 자연스럽게 중국이 독점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게 됐다. 결국 브레진스키의 예상과는 다르게 중앙아시아 자원 확보 전쟁의 최종 승자의 영예는 중국이 거머쥐게 됐다.
뿐만 아니라 브레진스키는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밀월관계를 비웃으며, 이를 “서로 더 가난해질 뿐”이라며 그 의미를 축소했다. 더 나아가 그는 중국과 러시아 동맹이 미국에게 위협이 되려면 이란도 이 동맹에 참여해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이란이 가난뿐이 줄 수 없는 중국과 러시아 동맹에 참여할 리 없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포퓰리즘 정책을 내세워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핵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더니, 이란의 전쟁 영웅 솔레이마니까지 암살함으로써 미국-이란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말았다. 분노한 이란은 (그간 거부하던) 중국과의 25년차 경제협력에 채결함으로써 미국에 반하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일원이 되겠다는 뜻을 밝혔고, 중국은 20년 이래 최대 외교적 성과를 자축하며 “말라카 딜레마”라는 용어를 공식문서에서 지워버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리드먼-자이한 계열의 지정학자들은 대체로 크레시-핸릭슨 계열의 “행운섬” 이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크레시-핸릭슨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한 까닭은 “세계섬”에 결코 하나의 정치적 목적을 가진 정치체가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하우스호퍼와 지베르트는 육상 강국의 팽창은 지리적 요소의 제한을 받으며, 이와 같은 공간장애 때문에 “세계섬” 전역을 지배하는 제국의 출현이 어렵다고 봤다. 당연히 미국의 지정학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중국과 러시아가 서로 싸우지 않는 이상 “세계섬”의 “심장지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설사 두 나라가 동맹을 맺는다 한들, 또 다른 “심장지대” 국가인 이란의 참여 없이는 이들의 동맹은 가난해지는 결과만을 초래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중국의 전략가들은 미국인들이 예상하지 못한(또는 예상했으나 불가능하다 여긴) 전략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①중∙러 밀월관계를 기초로 이란까지 참여한 “철의 삼각 동맹”을 만들고, 3개국의 영향력을 이용해 아프가니스탄 등 “심장지대”에서 미군을 축출한다.
②유라시아 내륙으로 통하는 항구에 대한 장악력을 이용해 “세계섬”에서 친미 성향의 국가 또는 정치세력을 고립시키며, 내륙 국가가 중∙러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③최종적으로 독일의 지정학자 포셋이 주장한 바와 같이 지중해-홍해 방어선까지 돌파하여 해양 세력에 대한 우위를 굳힌다.
이 같은 지정학적 주장은 미∙중 무역 전쟁이 시작된 2018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이를 “축출” 이론이라 부르고 싶다. 즉 중국, 러시아, 이란 3개국 동맹의 지정학적 우위를 이용해 미국을 유라시아 대륙에서 축출하자는 구상이다. 이 같은 축출 이론에 기반한 중국-러시아-이란의 “철의 삼각동맹” 이 만들어진 2020년 즈음부터 “심장지대”에 위치한 내륙 국가들의 정치적 움직임이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들 3국 주도 하의 군사협력체가 (하우스호퍼가 말했듯이) “심장지대”에 강력한 지정학적 요새를 건설한 상황이라, 미국과 이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본다(정확히는 미국의 군사력이 월등한고로 변수를 만들어내 승리를 이끌어낼 가능성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너무도 낮다). 더군다나 트럼프 재임 기간 동안, 러시아, 중국, 터키 모두 시리아, 수단, 지부티 등 지중해와 홍해 연안에 해군기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란이 지원하는 예멘 반군이 홍해로 진입하는 지역을 장악한 상황이라, 이미 이들 중∙러 군사협력체는 (포셋이 우려한대로) 홍해와 지중해 방어선을 돌파할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다.
쉽게 말해 지정학적 전략지대에서의 우열을 따질 경우, 중∙러 군사협력체는 우위를 점거하고 있으며, 미국은 열세에 놓인 상황이다.
프리드먼-자이한의 글을 보면 지정학적 전략지대 분석이 없거나 있어도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행운섬” 이론의 신봉자들이기 때문이다. 당연 그들이 보기에 유라시아 대륙의 복잡한 정치지형상 “심장지대” 국가들이 하나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뭉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나 발칸반도의 복잡한 인종 문제 연구로 코소보 사태를 예고한 프리드먼의 입장에서 보면 유라시아 지역 국가들이 인종, 종교 문제를 넘어 하나의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통합되리라는 것 자체가 망상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프리드먼, 자이한 모두 트럼프가 솔레이마니를 암살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만약에 그들이 이를 옹호한다면 그들은 연구자로서 자격미달이다). 브레젠스키가 불가능하다 여겼던 중국과 러시아, 이란의 동맹은 이제 현실이 됐고, 그들의 정치적 목적은 다름 아닌 “친미 세력의 유라시아 대륙 축출”이다. 이는 달리 말해 이들 3개국이 보기에 미국이 더 이상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전까지 군사협력체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https://biz.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021/05/13/4T54XYZH5ZC7NNK2XK64Z42WZQ/?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biz
https://newsis.com/view/?id=NISX20210524_0001450979&cID=10101&pID=10100
⁂ 중국 외교부의 고압적 태도와 이란의 대미 강경 외교는 이와 같은 지정학적 전략지대 조건 변화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중∙러 군사협력체의 등장을 통해 우리는 프리드먼-자이한 류類 학자들처럼 전략지대 연구가 아닌 정치지대 연구만을 진행할 경우, 자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서 얼마나 큰 오판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프리드먼 계열의 지정학 이론을 비판했는데, 이는 그들이 내륙 아시아에 대해 추상적인 개념만 있을 뿐, 이 지역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뿐만 아니라, 전략지대의 향방이 정치지대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분명 정치지대 연구라는 각도에서 보면 프리드먼-자이한의 주장대로 중국정부는 황무지인 신장에 대한 개발 자체를 시도하지 않겠지만, 현실은 지정학적 전략수요에 따라 2000년대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정학적 요새를 건설하고 있었다(심지어 미국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이를 막지 않았다). 중국 강남 일대의 생산력은 프리드먼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거대했으며, 신장 지역 정도는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부를 창출해냈다. 그리고 중국이 신장지역에 대한 지정학 전략을 수립한 까닭이 다름아닌 소련 해체 이후 나토의 동진과 여기에 대한 러시아 장성들의 울분 섞인 하소연 때문임을 생각한다면(대부분 중국인들은 지정학의 “위험성”을 나토 동진 때문에 처음 알게 됐다) 애초에 이 지역에 대한 중국정부의 판단은 정치적 차원이 아닌 전략적 차원이었으며, 이는 달리 말해 프리드먼, 자이한 등 지정학적 정치지대 비평을 주로 하는 연구자들이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었음을 뜻한다.
이 때문에 프리드먼-자이한의 주장을 받아들일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들의 지정학적 신념이라 할 수 있는 “행운섬” 이론의 대전제(유라시아 대륙의 정치적 분열)가 무너진 상황이라 그들의 지정학적 판단도 몇몇 정치적 이벤트를 맞추는 선에서 멈출 것이지, 거시적 예측은 틀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미국 중심의 대서양 동맹체제와 중∙러 군사협력체와의 대립이 지속될 경우, 중∙러는 자신들의 지정학적 우위를 이용해 유라시아 대륙에서 친미 성향의 정당이나 정치인들을 고립시킬 가능성이 크다(이미 그런 정치적 움직임이 슬슬 보이고 있다). 물론 유라시아 대륙이 모두 중∙러 군사협력체의 영향 아래 들어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미국과의 군사적 관계를 유지하거나 친미 성향의 국가들이 반월지대에 여럿 남아있는데 이를 구획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① 나토 가맹국(30개국)
② 아브라함 협정 방위권(이스라엘,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이라크 북부, 예멘, UAE 등 10개국)
③ 캅카스(조지아 1개국)
④ 인도 영향권(인도, 부탄 2개국)
⑤ 한반도(한국 1개국)
도합 43개국(만일, 일본,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타이완, 아이슬란드를 포함하면 49개국/정치세력, 여기에 대항하는 중∙러 군사협력체 구성원은 28개국/정치세력이다).
지도1: 중∙러 군사협력체와 “심장지대”
⁂ 지도에서 붉은색 선은 중∙러 군사협력체의 영향권, 붉은색 점선은 심장지대의 지리적 범위, 주황색으로 칠해진 지역은 “심장지대”를 둘러싼 반월지대에 위치한 친미 성향의 국가/정치세력이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의 외교적 고립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고립될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상술한 나라들은 미국과 중∙러의 대립이 고조될수록 내륙지대로 향하는 길을 차단당한 상황에서 3가지 상황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①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에 고립된다(조지아).
② 중∙러 군사협력체의 영향 아래 들어간 접경국과의 교류를 차단함으로써 지정학적으로 사실상 섬나라와 다를 바 없는 위치로 전락한다(인도, 한국).
③ 중∙러 군사협력체에 참여한 정부군(시리아 군대) 또는 이들과 연관된 군사조직(시아파 민병대, 헤즈볼라, 돈바스 반군)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이어간다(시리아, 이라크, 우크라이나).
따라서 “림랜드”에 위치한 나라들은 이 같은 시대적 변화를 인지하고(“행운섬” 이론→매킨더 “심장지대” 이론의 복귀), 아래와 같이 지정학적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본다.
① 중∙러 군사협력체의 본질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심장지대” 국가들의 정치적 연합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미국이 “심장지대”로 정치∙군사적 팽창을 시도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이들은 “철의 삼각동맹”을 해체하지 않을 것이다(오히려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② 중∙러 군사협력체가 유라시아 내륙지대에서 바다로 향하는 모든 항구도시를 장악한 상황이라(이란, 파키스탄, 중국, 러시아) 내륙지대 국가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친미가 아닌 중∙러 군사협력체에 굴종하는 정치적 선택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한국 같은 나라가 중∙러 군사협력체와의 대립각을 세우려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고립되거나 이들이 만들어가는 유라시아 내륙 경제권에서 추방될 각오를 해야함을 뜻한다. 국내 극우 지식인과 언론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고립을 이야기하던데 내가 봤을 때 지금은 우리가 유라시아에서 추방당할 것을 걱정해야 할 때다.
③ 중국과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심장지대” 요새화를 진행했으며, 중앙아시아 자원 확보에 열을 올렸다. 우리는 이들이 이미 지정학적 요새 건설을 완성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사우디아라비아에 필적하는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란까지 중∙러와 연합한 상황이라 이들이 정치적으로 무너질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미국에 반하는 내륙경제체제를 만들어 버티기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냉전 시대처럼 또 다른 세계 경제 이원화 시대를 불러올 것이다. 따라서 이들과의 대립을 지속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지가 아니다.
2. 지정학적 정치지대 분석
물론 지정학이 전략지대 문제만을 연구하는 학문은 아니다. 전략지대 연구의 하위 분야로 정치지대 연구도 존재하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라드먼-자이한이 바로 정치지대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능력을 보여준 전문가라 할 수 있다(그리고 이들을 위해 변명하자면 그 누구도 트럼프 당선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정학에서 정치지대라 함은 지리적 요인 때문에 하나의 정치적 단일체로 여겨지는 지역들을 뜻한다. 발칸반도와 인도차이나, 그리고 서아시아 등 지역정세에 대한 지정학적 분석이 여기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세계 모든 나라의 정치지대 문제를 다룰 수는 없으니, 중동 문제를 예시로 들어보겠다.
대체로 지정학에서는 중동 지역(아프가니스탄 포함)과 아프리카를 분쇄지대라 부른다. 전략지대 비평을 즐겨하는 이들의 주장을 따를 경우, 중동지역은 육상 세력과 해상 세력이 만나는 지점이다 보니 전쟁과 분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주장을 믿어야 하지만, 만약 정치지대 비평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경우, 우리는 조금 새로운 해석에 도달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외교관들을 지배하던 지정학적 이론은 다름아닌 강대국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어 이들의 충돌을 방지해야 한다는 “완충지대”론이었다. 나아가 이들은 독일이 빌헬름 2세 때와 같이 다시금 석유 자원을 얻기 위해 남하를 시도할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독일이 바그다드 철도를 이용해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독점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영국과 프랑스는 ①독일과 터키의 남하를 막고, ②자신들이 중동과 페르시아만에서 나오는 석유를 독점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독립시키게 된다. 문제는 이 지역이 오래전부터 아나톨리아 또는 페르시아에서 발원한 제국들의 최종점령 목표였을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세계제국의 수도가 위치한 정치적 중심지다 보니,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기보다는 페르시아 또는 아나톨리아 제국에게 예속된 형태로 자신들의 삶을 이어 나갔다. 당연 이들에게 있어 민족성보다는 세계성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더 부합했으며, 이슬람교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만이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시리아와 이라크를 터키와 이란으로부터 독립시키면서 우리는 중동 지역이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됨을 알 수 있다.
①이슬람 세계주의의 소멸과 민족적 대립의 격화. 원래 이 지역은 아나톨리아와 페르시아의 군사적 강자가 통합한 제국에 예속되다 보니 당연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세계시민 의식만이 이들의 삶을 지배할 수 있었고, 부족 간의 다툼과 종교 종파 사이의 투쟁은 존재했지만 강력한 군사적 힘을 가진 이슬람 제국에 의해 이와 같은 차이는 억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라는 이슬람제국이 강제로 해체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자,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오랜 정체성인 세계성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이슬람 근본주의로 회귀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대체로 이슬람 국가들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세계성을 유지하는 정당의 집권 또는 세계성 유지를 목표로 하는 권위주의 체제를 선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권위주의 체제는 이슬람 세계의 와해가 불러온 공백을 모두 메꿀 수 없었으며, 부족주의와 종파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대립은 결국 시리아 내전과 ISIS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됐다.
②터키와 이란의 본능적 팽창. 나아가 원래 중동지역의 패자인 터키와 이란은 자신들의 지정학적 팽창한계선인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의 진출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이란의 경우, 예로부터 이 일대의 시아파 정부 또는 군사집단을 지원했으며(헤즈볼라, 아사드 정권,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민병대), 터키는 쿠르드족 퇴치를 명분으로 시리아 북부를 강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자신들의 팽창한계선이라 할 수 있는 시리아 사막(터키) 또는 지중해 동부 연안지대(이란)에 미달한 상황인지라, 가까운 미래에도 이 일대의 종파주의와 부족주의 대립에 개입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할 것이다.
지도2: 터키와 이란의 진출
실은 시리아와 이라크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파주의와 부족주의 대립만을 불러오는 기존의 국경선을 해체하고, 터키와 이란의 팽창한계선에 따라 새로운 국경선을 긋는 것이지만, 이런 제국주의적 방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터키와 이란은 제국 시절 향수를 잊지 못할 것이며, 그들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팽창한계선 안에 위치한 정치 세력들을 자국의 영향력 아래 두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지대 분석은 중국 연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중국 역사를 통해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다름 아닌 “심장지대”와 반월지대를 연결하는 중간고리에 지정학적 요새를 만든 정치세력이 중원 쟁탈전의 최후 승자가 된다는 점이다. 진시황 이래 한 고조 유방, 우문씨의 관룡집단, 이극용의 사타 제국주의, 그리고 아골타의 금나라와 누르하치의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심장지대”와 반월지대 사이에 위치한 이들은 ① “심장지대”를 통해 자신들의 부족한 물자를 다른 지역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② 방어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치 중심지를 지키고, ③ 최종적으로는 해안선까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 이점에 대해 인식했던 중국인들은 창업군주에게 천하의 중심인 낙양보다는 장안에 도읍을 정할 것을 권했으며, 이는 장안 지역이 제국의 수도가 될 수 있던 주요 요인이었다. 반대로 중국인들이 “심장지대”로의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물류 중심지인 번경 또는 생산성이 높은 건강 등지에 수도를 정했는데, 이 경우 중원대륙의 부분적 지배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세계제국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따라서 명나라 영락제가 제국의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한 것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보면 전혀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상술한 예시를 통해 우리는 전략지대 차원에서 해석되지 못하는 문제들이 정치지대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전략지대와 정치지대를 하나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기에는 어려운데, 간혹 전략지대 차원에서의 목적성을 가지고 정치지대를 아우르는 하나의 정치연합체를 만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70년대 프랑스 지정학자들의 전략지대 판단과 EU의 형성은 우리에게 좋은 예시를 알려준다. 70년대 이르러 프랑스에서는 스파이크먼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지정학자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해양세력 지분은 이미 미국이 가져갔고, “심장지대”의 지분은 소련이 가져간 고로, 프랑스가 이들에 준하는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월지대에 미국, 소련에 준하는 정치연합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삼지대론). 따라서 이들은 전략지대에서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 정치지대 통합을 외쳤으며, 이들의 지정학적 주장은 훗날 EU 형성의 이론적 기초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 정책을 수립할 때, 한 지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이와 같은 고민에서 비롯된 전략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지정학적 정치지대 비평이 따라와야 함을 알 수 있다. 나아가 프랑스의 삼지대론은 프리드먼, 자이한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지정학적 전략지대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정치지대 문제를 토론하는 한국의 지정학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리라 본다(성공한 지정학 정치이론은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공간과 위치를 판단하는가).
이런 삼지대론을 적용할 시, 세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정치 공동체는 유럽 외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이 있다. 현재 인도는 종교적인 문제로 그어진 국경선 때문에 내륙 아시아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파키스탄 또한 내륙지대와 해양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은 할 수 있지만, 이마저도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해 중국과 이란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내륙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게 되고,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가 삼지대론에 입각해 새로운 경제 공동체를 만든다면, 세계 정치지형을 바꾸는 중요한 이벤트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종교 문제와 70년간 이어오던 정치적 대립을 해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이들의 연합이 위협적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현재로서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3. 한국에 필요한 지정학 담론은 무엇일까?
이제 한반도 문제로 넘어가보자. 그간 우리나라의 지정학 담론은 대체로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거대한 지정학적 정치지대로 가정하고, 이 정치지대의 중심국이 되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의 지정학은 아래와 같은 문제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① 동북아시아라는 가상의 정치지대를 하나의 실체로 이해하려 하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를 할 수밖에 없고, 당연 실용성 없는 학문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② 한반도 문제를 전략지대 시각에서 놓고 분석하는 글이 적다 보니,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과대평가하거나, 미국과 중∙러 사이의 전략적 대립을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은 우리나라처럼 전략적 강자(중국, 러시아)와 인접한 경우, 정치지대 연구보다는 전략지대 연구로 스스로의 위치를 파악하는 편이 좋다. 다만 전략지대 연구라는 각도에서 한반도에 대한 지정학적 비평을 하게 될 경우, 우리는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이 아닌(오히려 세계의 중심인 “심장지대”는 중국과 러시아, 이란 등 내륙지대 강자들이 점령하고 있다) 해상세력과 육상세력 사이에 위치한 교두보임을 알 수 있다. 여러 지정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런 지정학적 교두보는 독자적인 지정학적 생존을 도모하기 보다는 강대국 사이에서 자국의 필요에 따라 외교정책을 수정하며 실리를 취하려 한다. 반대로 육상세력과 해상세력 또한 이들 지정학적 교두보가 가지는 정치적 특수성을 이해하고, 이들을 완충지대로 두어 서로 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제는 한국이 과연 지정학적 교두보라 할 수 있을까? 지정학적 교두보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① 지리적으로 이들은 “심장지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심장지대”로 이어지는 교통 인프라의 출발점이 위치해 있다.
② 이들은 해양세력과 육상세력이 만나는 지점이다 보니 개방성과 세계성을 자신들의 문화적 특징으로 삼는다.
③ 당연히 이들은 외국인 이민자들에 대해 열려 있는 사회를 지향하며, 외국인 노동자를 대거 수용해 자국의 노동 수요를 충족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상술한 조건만을 놓고 보면 한국은 지정학적 교두보가 아닌 섬이나 다를 바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단 한국에서 “심장지대”까지 이어지는 교통 인프라가 전무한 상황이다. 아울러 다양성과 개방성 측면에서 보자면 (이번 화교 사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는 거의 낙제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폐쇄적이다. 이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아우러지는 다른 지정학적 교두보(홍콩, 마카오, 연해주, 중국 동부 “황금해안”, 태국)와 비교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이민자 정책도 폐쇄적이고 엄격하기 때문에 한국을 지정학적 교두보로 보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은 섬나라 일본, 타이완에서 보이는 특징들(폐쇄성, 서열중시, 경직된 이민정책)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로 보아 한국은 지리적으로는 반도지만, 정치적 요인 때문에 사실상의 섬나라와 다를 바 없는 위치로 전락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듯하다.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우리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H축 경제개발 구상이 지정학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①현재 미국 중심의 대서양 동맹체제와 중∙러 군사협력체 사이의 충돌이 점차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륙 연결 구상은 결과적으로 중∙러 군사협력체의 영향 아래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여기에 대한 아무런 국민적 합의도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 속에서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다.
②우리나라는 지정학적 기능 면에서 지정학적 교두보보다는 섬나라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 같다. 휴전선에서의 군사적 대치 국면으로 인해 우리나라와 중국, 러시아와 같은 심장지대를 연결하는 교통 인프라는 전무한 상황이며, 이는 우리가 북한과는 다르게 “심장지대”와 해양세력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을 지정학적 교두보로 이해하기보다는 일본이나 타이완과 같은 “세계섬” 근해의 섬나라 또는 섬을 지배하는 정치세력으로 이해해야 하며, 이는 한국이 반월지대 국가가 아닌 미국과 같은 해양세력임을 뜻한다(고로 우리의 정치적 선택도 해양세력인 미국을 따라가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도 코헨의 《지정학: 국제관계에서의 지리학》에서는 “통일된 한반도”를 지정학적 교두보로 나열하고 있지, 분단된 상태의 한국 또는 북한을 지정학적 교두보로 보지는 않고 있다. 이는 코헨이 보기에도 한국과 북한 모두 지정학적 교두보 기능을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두보 지역에서 보이는 개방성, 세계성 대신 폐쇄성 짙은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코헨은 한국이 통일되면 동아시아 공업중심은 일본에서 한반도 서부와 요동을 연결하는 구간으로 이동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북한의 정책 방향과 국내 우파 사조의 유행을 생각하면, 통일은 먼 나라 이야기일 것 같아 걱정이다. 적어도 현재 한국을 교두보 국가로 보기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어렵지 않나 생각해본다.
③이 같은 지정학적 요인을 고려해 본다면 한국인들은 당연 여타 해양세력 국가와 같이 친미적인 정치적 판단을 할 것이며, 지정학적 교두보 지역에서 보이는 개방성 대신 폐쇄적인 사회 구조를 유지함과 동시에 미국 의존적인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한국의 정치인들은 자국의 경제발전 가능성이 정치적 통일과 이로 인한 동아시아 공업지대 축의 이동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이런 정치적인 판단을 이해하지 못하고, “친중∙친러”라 매도하며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극우 정치인들에게 표를 줄 공산이 크다. 이는 한국이 지정학적 교두보의 지리적 조건만을 갖추고 있을 뿐, 휴전선의 존재로 인해 사실상 기능면에서 섬나라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심지어 이들의 경제 발전조차 해양세력인 일본과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정치적 성향도 우리와 기능적으로 유사한 일본, 미국을 따라갈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나는 한국이 극우화는 될지 언정 진보 또는 균형론을 외치는 정당의 장기집권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정학 연구도 크게 두 가지 방면으로 나뉠 수 있다고 본다.
① 우리 스스로 해양세력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고, “심장지대”와 반월지대 국가들을 타자로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생각했을 때, 그간 한국의 지정학자들이 저지른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해양성을 망각하고, 대륙성을 강조한 데 있다. 그러나 우경화된 국민 여론과 배타적인 사회구조를 생각해보면 적어도 통일되기 전까지 반월지대 국가에게 적용되는 어떤 지정학적 이론도 우리에게 적용될 수 없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편향됐으며, “심장지대”와 반월지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는 한, 우리는 독자적인 지정학적 정치지대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지정학적 가치는 마한 제독이 말한 서태평양 도련선(필리핀, 하와이, 괌, 폴리네시아 군도 등으로 이루어진 미국 본토 방어선)에 의해 결정되며, 일본과 함께 서태평양 방어선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② 동시에 통일 이후 우리 사회가 직면할 지정학적 조건 변화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통일은 단순히 백 년 가까이 지속된 동족상잔 역사의 종언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도 사실상의 섬나라에서 지정학적 교두보로 바뀜을 뜻한다. 일단 통일이 되면 중∙러 중심의 내륙지대 경제권에 예속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는데, 나는 우리 사회의 개방성과 관용성에 있어 물음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금 같은 국민성으로는 통일 이후 우리가 직면해야 할 변화를 감당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4. 결론
이상 지정학의 현실 응용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 지정학자들의 상상력에 끊임없이 도전했다는 점 아닐까? 중국의 “축출” 이론은 사실상 “공동의 적”인 미국을 “심장지대”에서 몰아내기 위해 “심장지대”에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중국과 러시아, 이란의 군사적 연합을 기초로 한다. 이런 외교적 발상부터가 매킨더의 “심장지대” 이론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음을 생각한다면 중국 또한 지정학적 이론에 기초해 자신들의 외교 정책을 수립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2000년대 대량의 지정학 연구서를 번역함과 동시에 (하우스호퍼가 주장한 것처럼) 신장지대에 강력한 “지정학적 성채”를 만들었다. 서부대개발이라 이름한 이 정책은 곁보기에는 서부 지역 대형 교통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지정학 이론에 기초해 신장 지역의 자원 개발과 교통 인프라 건설, 중앙아시아 자원 이용 등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 행동이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듯하다. 이 지정학적 요새는 중국과 이란의 25년 협정으로 완성되었으며, 중국과 러시아, 이란이 처음으로 연합 해군훈련을 실시했던 2019년부터 내륙지대 국가들은 점차 이들에게 굴종하거나 연대하려는 모양세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 또한 지정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시리아로 진출하고, 터키의 독재자 에르도안에게 무기를 지원함으로써 흑해를 자국의 내해로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푸틴은 지정학자들의 주장처럼 지중해-홍해 일대에 해군기지를 만들어 해상세력에 대한 지정학적 우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행운섬” 이론의 신봉자 프리드먼은 러시아와 이란의 해군력이 약하다며 애써 그 의미를 부인했지만, 내가 봤을 때, 미국은 지정학적 열세에 처해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듯하다.
따라서 미국이 상대해야 하는 중러 군사협력체는 아래와 같은 지정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 역사상 최초로 “심장지대”를 하나의 정치적 목적(미국의 축출)으로 응집시킨 정치적 연합체다.
② 중국은 “서부대개발”, “일대일로” 등 교통 인프라 건설을 통해 과거 지정학에서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여겼던 지정학적 성채를 완성시켰다.
③ 심지어 이들은 지중해, 홍해 진출까지 한 상황이라 해상세력의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실은 해상세력의 열세가 더 정확한 표현인데 미국의 해상세력이 강하니 일단 장담할 수 없다고 쓰겠다).
이처럼 지정학은 단순한 지리결정론이 아니다. 지정학자들은 지리적인 요인에 기초해 세계질서가 어떤 형태로 바뀔 것이며, 그 조건들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그리고 이런 조건들은 (중국과 러시아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지정학에는 정답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해 지정학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지금도 변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지정학을 알면 미국이 초강대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중국이 미국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는 나무위키의 지정학 항목의 내용은 이 학문의 본질을 망각하고, 정치적인 변증 수단으로 지정학을 변질시키는 아주 잘못된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정학에서는 중요한 3가지 요소(자원, 접근성, 공간의 군사적 이점)가 있는데, 나무위키의 서술은 이 3가지 요소를 모두 무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서술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지정학적 비판이 가능하다.
① 정치지대 연구는 전략지대 연구에 종속되며, 전략지대 조건이 변할 시 정치지대 조건도 변한다.
② “심장지대”가 하나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통합될 시, 세계질서는 변하게 된다(심지어 브레진스키조차 이 위험성을 인식했다).
③ 만약 “심장지대”를 통합한 정치세력이 내륙지대를 관통하는 근대적 교통 인프라를 건설하고, 여세를 몰아 홍해와 지중해까지 진출할 시, 육상세력은 해상세력을 압도하게 된다.
지금 그나마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과 기술 우위 때문에 미국과 중국∙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이 이루어진 상황이지, 지정학적 전략지대 상황만을 놓고 보면 미국의 지정학적 우위는 이미 장담할 수 없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세계섬”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중국과 러시아는 “심장지대”를 하나로 만든 정치적 역량을 이용해 세계질서를 바꾸려 하겠지만, 미국은 이들이 세계질서를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전쟁 없이 양자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미∙중∙러 3개국 회담을 통해 육상세력과 해상세력의 세력권을 확정 짓는 것이지만, 여기 찬성할 미국 엘리트 층이 어디 있겠는가? 설사 지정학자들이 미국의 유라시아 재진입 가능성을 외치더라도 결국에 가서 미국 엘리트층은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양자 간의 대리전 또는 전면전 형태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아마도 전장은 발칸반도와 동유럽 대평원,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가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전쟁 가능성을 줄이고, 중∙러 군사협의체로 하여금 미국의 금융 패권과 해상 우위를 인정하도록 하며, 서로의 지정학적 전략지대 경계선을 확정 짓는 것이라 본다. 일단 중∙러 군사협력체의 주요 구성원들(중국, 러시아, 이란, 터키)이 원하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미국 세력의 유라시아 축출) 이들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군사협력체를 해산하고, (과거 자신들의 협력 관계를 잊어버리고) 곧바로 “세계섬”의 지배권을 놓고 충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미국은 군사적 우위와 기술 우위를 이용해 자국에 유리한 정치적 선택을 한 다음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면 된다. 지금처럼 “심장지대”가 하나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뭉친 이상, 유럽 대륙과 해상에서의 이권을 지키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지(어차피 “세계섬”은 다시 분열될 것이며 미국은 그들의 분열을 이용해 “세계섬”에 재차 진출하면 된다), 제3차 세계대전 또는 그에 준하는 전쟁을 불러올 중∙러 군사협력체와의 전면전만은 피해야 한다.
이제 세계대전 발발 여부는 워싱턴의 정치적 결정에 달려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워싱턴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까닭이다.
5. 후기
2021년 4월 9일, 중국은 자국 내 희토류 기업의 환경 문제를 이유로 생산 중단을 요구했다. 그리고 한달이 조금 넘은 지금, 희토류는 중국 내수 시장에서만 거래되다 보니 시장가격이 하락하고 있고, 반대로 해외에서는 희토류를 매입하지 못해 공급처를 찾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당시 중국에서 희토류 공급량을 자국 내수시장만 만족할 수 있는 양까지 감산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게 석유 금수조치를 내린 미국이 80년만에 중국에게 희토류 금수조치를 당한 꼴”이라고 평가했다. 과거 미국은 말라카 해협을 봉쇄함으로써 중국의 석유 공급망을 위협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이란과의 25년 경제협정으로 인해 육로로 운반할 수 있는 석유를 텍사스유 대비 30% 싸게 살수 있는 길이 열린 상황이라 미국 쪽에서 이에 상응하는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중국의 희토류 감량 조치에 분노한 바이든 대통령은 원래 설리반 국가안보보좌관이 주최하기로 했던 반도체 회의를 직접 주최하며,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반도체 시장의 현실을 보면 미국의 뜻대로 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지인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재 중국 민간기업들은 로우엔드 반도체 투자 비중을 늘리면서(하이엔드 반도체는 10년 적자를 각오해야 하는 영역이다 보니 중국 중앙기업과 화웨이 같은 대규모 기업체만 투자하는 상황이며 주식 상장도 금지되어 있다), 반도체 시장에 투입되는 자본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이 자본의 힘으로 타이완과 한국의 로우엔드 반도체 기업들을 차례대로 도산시키고,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구상을 하는 중이라고 한다(메모리는 삼성의 아성아 워낙 강해 시간이 걸리지만 타이완 로우엔드 시장은 3년 안에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물론 이번에 호주와의 무역 마찰 때문에 일어난 철광석 사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자원 수급 상황 또한 좋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중국이 수입해야 하는 자원(석유, 천연가스, 아연, 철, 알류미늄, 크롬, 망간 등) 가운데 상당수는 이란,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지에서 얻을 수 있다 보니, 미국과 중∙러의 지정학적 경쟁이 지속될수록 중국 회사들은 중앙아시아 자원 개발을 통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자원을 얻으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급자족형 경제를 만드는데 대략 6-8년 즈음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런 일렬의 사태를 보면서 지정학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키신저가 중국을 자유 시장에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있는데, 나는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키신저가 아니라, 프리드먼, 자이한, 그리고 트럼프라고 생각한다. 지정학적 전략지대 비평을 하자면 키신저는 중국과 소련이라는 심장지대에 지분을 가진 두 나라의 분열을 이용해 이들의 대립을 지속하게 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중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전통적인 무역망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일대일로와 함께 진행된 대규모 교통 인프라 건설 사업 이전까지 “심장지대”는 중국과 소련의 군사적 대치가 이어지는 황무지에 불과했다. 키신저의 외교정책이 중국을 성장시켰다는 점에 있어 비판받을 수 있지만, 당시 워싱턴의 주된 목표가 (중국이 아닌) 소련 견제였음을 생각하면, 키신저의 외교정책은 “심장지대”를 관통하는 교통 인프라 건설을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이 일대의 정치적 분열과 미개발 상태를 지속시킨 훌륭한 외교정책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오히려 비판받아야 하는 쪽은 “심장지대”의 중요성을 망각한 프리드먼, 자이한 계열의 지정학자들이다(당연하지만 이들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소개한 이춘근 씨 같은 국내 지식인들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들은 “행운섬” 이론에 기초해 “심장지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망각하고, 이 일대가 접근성 면에서나 자원 확보 면에서나 모두 해상 무역망을 뛰어 넘는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다. 심지어 키신저의 대중국 외교정책으로 파괴된 중앙아시아와 중국 신장 지역의 전통적인 국제 무역망에 대해 그들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고원이라는 자연 장애물 때문에 이 지역을 관통하는 국제 무역망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면서 “행운섬” 이론의 결론-오직 미국만이 세계질서를 만들 수 있다-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행운섬” 이론의 대전제인 “심장지대”의 분열은 점차 지정학자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전통 지정학에서 말하는 세계 패권의 중요 요소인 ①자원과 ②접근성(교통, 위치), 그리고 ③공간의 군사적 이점은 점차 ①자원 분포와 ②인종 문제, 그리고 ③해상 무역로로 대체됐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과 러시아인들은 전통적인 지정학에 충실히 따르며, “심장지대”에 자신들의 지정학적 요새를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어느새 중앙아시아의 천연가스와 석유는 파미르고원을 넘나드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중국 상하이까지 운반되고 있으며, 중국인들이 만든 고속도로와 철도는 중국제 상품을 민스크와 베를린까지 운반되고 있다. 이렇게 중국인들과 러시아인들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매몰된 틈을 타서 중앙아시아에 전시 후방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공업지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리드먼-자이한 계열의 지정학자들은 오만한 태도로 중동지역 문제를 접근했다. 중동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그들은 놀라운 수준의 무지함을 보여주었는데, 종파문제보다는 인종 문제를, 내륙지대로의 접근성보다는 해상 무역로와 자원 문제를 강조하면서 기존 지정학 언어들을 하나씩 바꾸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지정학의 본질적인 요소들은 점차 자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되고, 주요 자원들은 모두 미국에서 나오기에 유라시아 대륙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해괴망측한 주장까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오래 전 매킨더가 “심장지대”를 관통하는 근대적 교통 인프라가 건설되고, 이 일대의 자원을 독점하는 세력이 가지게 될 전세계적 영향력에 대해서 경고한 바 있음에도, 그들은 전통 지정학의 가르침을 무시해 버렸다.
전통적 지정학의 가르침을 무시한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실수로 이어졌다. 인종적 다원성을 사회적 취약성으로 여긴 프리드먼의 주장은 곧바로 미국 엘리트층의 이란의 사회 안정성에 대한 오판으로 이어졌고, 과거 발칸반도 국가들과 같이 이란 또한 인종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적 분열이 일어나리라 봤다(이란인들은 페르시아 문화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하고, 시아파라는 결집력 있는 종파 사상으로 뭉쳐 있기에 이들의 분열을 상상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런 잘못된 지정학적 조언으로 인해 미국 엘리트층은 이란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잘못된 판단에 기반한 대 이란 강경책은 이란 내 개혁파의 입지를 줄여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트럼프는 이란의 전쟁 영웅 솔레이마니를 암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중∙러 군사협력체의 형성으로 인해 이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는 전래없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과정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트럼프와 극우 정치인들, 그리고 지정학자들의 자가당착이라는 말뿐이 나오지 않는다. 발칸반도라는 정치지대 연구로 각광받은 프리드먼은 자신의 성공에 취한 나머지 발칸반도에 적용할 수 있는 모든 지정학적 요인들을 전세계에 적용시켰고, 이 과정에서 기존 지정학적 어법을 모두 파괴시키거나 해체해 버렸다. 그리고 기존 지정학 어법의 빈 자리를 채운 것은 다름 아닌 “행운섬”에 대한 프리드먼과 자이한의 “믿음”이었다. 하지만 “행운섬”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키신저를 비롯한 노련한 미국의 정치인들과 지정학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요, “심장지대”를 점령한 소련의 지정학적 우세를 열세로 돌리기 위한 한 세대의 노력이 응집된 예술품이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단지 미국의 공간적 이점 때문이라 치부하고, 나아가 “심장지대”의 접근성과 발전 가능성을 모두 무시했으니, 어찌 정확한 지정학적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프리드먼과 자이한 계열의 지정학이 유행했을 때부터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와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인들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판단을 했는가? 왜 그들은 중∙러 군사협력체라는 “베헤모스”를 마주쳐야만 하는가? 여기에 대한 지정학적 반성이 없는 한, 미국이 과거와 같은 지위(중앙아시아 진출까지 하는 전세계적 패권국)를 회복하기란 진실로 어렵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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