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 혼란이 우리의 지정학적 조건과 맞기 않기 때문에 발생한 촌극이라 생각한다. 한국은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정치적으로 보다 세분화될 필요가 있다.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경계가 불명확하기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모르거나 알아도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 측은 문재인 후보 측의 복지 어젠다를 선점하겠다고, 역으로 민주당보다 더 과감한 보편 복지 정책을 공약으로 내건 적이 있다. 이 경우, 우리는 과연 박근혜 대통령을 우파 대통령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좌파 대통령으로 봐야 하는가? 또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내내 대 일본 적대 정책을 펼치면서 내셔널리즘에 호소하는 정책을 실행했을 뿐만 아니라, 내셔널리즘 공동체의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일관되게 대북 유화책을 추진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우파의 흔적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정치적 현상이 벌어지는 까닭을 생각해 보면 양당제兩黨制라는 우리의 신체 사이즈보다 작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나라가 자기 자신의 공간적 특징에 맞는 정치제도를 가지게 함으로서 정치적 분열과 혼란을 종식시키고, 보다 안정적인 정치적 환경 위에서 새로운 번영을 누리게 할 이론적 기초를 다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에 대해 생각해보자. 황하유역이 만들어내는 거대 인력으로 인해 통일 제국을 이룩한 중화제국과 유라시아 초원에 기반한 루스와 투르크, 몽골로 구성된 연합 제국을 건설한 러시아 제국과 달리 한국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공간이 없다.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역은 오로지 한 곳, 한반도에서 가장 큰 평원이 있는 대동강-예성강 유역뿐인데, 이 지역은 현재 북한 땅이다. 분명한 사실은 서울이 한반도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려면 ①예성강 유역과 ③평택 평야의 자원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휴전선은 서울로 하여금 이 같은 지리적 이점을 살리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눈에 띄는 평원(대동강 유역, 예성강 유역, 한강 유역, 평택 평야, 함흥 펑야, 호남 평야)을 제외하면 대다수 한국인들은 분지에 살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여러 분지에 대규모 도시들(대전, 대구, 청주, 충주, 안동, 영천, 철원 등)을 건설했는데, 이는 강물을 낀 평원지대에 도시를 건설하는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광활한 평원에 동서를 관통하는 교통 인프라를 건설한 다음, 도시를 만드는 러시아인들이 보기에도 어리석은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상, 몇몇 평지를 제외하면 대다수 사람이 사는 지역은 분지일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우리는 태생적으로 산지에 둘러싸인 공간에 익숙하다. 둘러싸인 공간은 우리에게 모종의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그것은 내가 보는 것이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공간의 전부이며, 이 공간 밖에 있는 대상은 나와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다. 주변국에 대한 우리의 공포심은 사실상 둘러싸인 공간에 익숙한 우리의 시각적 체험과 관련 있다. 나와는 다른 문화가 존재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공간 밖에 위치한 타자의 문화가 우수할 경우, 갖은 수단을 동원해 상대방을 깎아내리는(이 과정에서 서구에서는 금기시되는 인종주의 차별 발언까지 거리낌없이 하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우리 안에 내재된 파쇼적 공격성은 이 같은 지리적 공간에 기반한 체험이 만들어낸 부끄러운 국민성國民性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태생적으로 반-지정학적 민족이다. 지정학은 우리의 단점이 무엇이고, 왜 동아시아 국가들(중국·일본·한국·몽골) 가운데 우리가 인종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지 설명해 준다. 반-유대주의 열풍이 유행했던 독일 남부 산지대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한반도의 지형적 유사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우리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고립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발칸반도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소수의 평원과 분지로 구성된 공간에 사는 민족은 이 때문에 우리는 공동의 적이 침입할 때, 누구보다 강한 단결력을 보여주지만, 반대로 외부 위협이 사라질 경우, 다시금 지역 간의 이권 다툼으로 회귀하는 역사적 사이클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역사는 사실상 ⓐ중국식 중앙집권국가를 꿈꾸는 이데올로기스트와 ⓑ한반도의 지리적 공간에 기초한 지역주의자들 간의 지난한 싸움이라 정의할 수 있다. 느슨한 연맹체는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에 부합하는 정치 체제였지만, 거대한 적과 맞서기에는 개별 부족의 역량이 너무도 약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이해 관계조차 너무도 다른 고로, 고도로 조직화된 중화제국과 중요한 역사적 순간마다 강한 집결력을 보여준 유목제국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공간적 특징 때문에 삼국시대 중엽부터 이들의 침략에 맞서 하나의 지리적 이해관계를 가지는 연맹체들이 뭉쳐 저항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스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신화적이고 종교제례적 기능만 있던 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조직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방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군권을 빼앗아 왕에게 집중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수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이 이데올로기스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달리했다. 때로는 명림답부로, 때로는 최치원으로, 때로는 쌍기로, 또 때로는 정도전으로, 역사의 순간마다 이들은 이름을 달리하면서 한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조직화하려는 정치적 실험을 감행했다. 아울러 역사가 증명하듯 이런 이데올로기스트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군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장수왕長壽王, 성명왕聖明王, 신무왕神武王, 광종光宗, 태종太宗 등 여러 중앙집권적 정책을 추진한 왕들은 지방 세력의 저항을 꺾어버리고자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으며, 왕권에 저항하는 자들에게는 피로 값을 치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보여줬다. 결국 강력한 왕권에 기반한 숙청과 공포정치는 지방 세력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권력을 반강제적으로 양보하게 만들었으며, 이 같은 양보를 통해 국가는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직화된 국가는 오래갈 수 없었는데, 이는 거대한 평원 지대로 이루어진 미국·중국·러시아·인도와 다른 한반도의 지형적 특징 때문이다. 묘향산맥과 멸악산맥-마식령산맥, 차령산맥, 노령산맥, 소백산맥, 태백산맥 등 여러 산맥은 한반도를 여러 개의 격리된 공간으로 나눌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서울 정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한반도는 서울 정부가 무너지게 되면 (중국처럼 하나의 제국 의식을 가지고 지방 군벌들이 난립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의에 기반한 개별 국가로 나뉘게 된다. 후삼국後三國 시대는 사실상 이 같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정치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한계를 넘어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신라는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여 국가를 재조직했으며, 고려 태조는 호족 여식과의 결혼을 통해 지방 호족 간에 일어날 수 있는 무력 충돌을 궁정 정치로 치환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정도전과 태종은 십 수년간 지속된 내란과 공신 숙청을 통해 정적과 잠재적인 권세가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해버렸다.
따라서 한반도의 역사는 ⓐ생존을 위해 국가를 하나의 이데올로기 아래 뭉치려는 힘과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 지역주의로 나뉘려는 힘이 충돌하는 역사다. 이 상반된 힘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한반도에서의 힘의 균형을 이루는데, 전자는 인간의 의지로 인함이라면, 후자는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 동물적으로 체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반도 정권의 생명은 역설적이게도 이데올로기의 생명과 같이 한다. 고려의 불교(물론 이 시대 불교는 통치이념적 성격이 강했다)와 조선의 성리학, 한국의 반공적 자유민주주의, 북한의 주체사상 모두 이데올로기로 한반도를 조직하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통치이념인 이데올로기의 붕괴는 곧 한국을 통일한 왕조의 죽음을 뜻한다. 그리고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의해 국가가 다시금 조직되기 전까지 한국은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 다시 지역주의 정권으로 분열된다. 이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극단적 내셔널리즘에 취해) 유독 중국과 러시아의 분열을 상상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중국이나 러시아가 왜 거대 제국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정학적 통찰력이 결여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진 지정학적 취약성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다. 실상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지역주의는 중국 푸젠福建, 광둥廣東, 광시廣西, 티베트 등지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특별한 사회적 현상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왜 중국이나 인도, 스텝제국(지금은 러시아가 그 지위를 계승했다)과 미국이 거대한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이런 민족은 대체로 자신들이 가진 특수성을 특수성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보편성으로 인식해버리는 바람에 정책적 오판을 저지른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은연 중에 “국가운영에 대한 이념적 합의(국가를 조직하는 가치관 내지는 사상 체계의 교집합 내지는 근간)”이자 체제적 근간인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인지 아니면 주체사상이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생존 본능은 이데올로기가 곧 국가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알려주며, 이 같은 이데올로기가 없는 한국은 지역주의에 의해 해체될 수밖에 없는 나라임을 알려준다(심지어 지역주의가 국가 해체에 미칠 영향력은 중국·일본보다 더 크다). 이 때문에 민주당 같은 정당은 통일된 내셔널리즘 국가 건설 자체를 하나의 이념으로 승화시켜 자유민주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삼는 보수주의자들과 대립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 정치가 분열과 반목으로 점철된 까닭은 ①(우리가 고려·조선 시대처럼) 하나의 이념 아래 다양한 지역주의자들이 다투는 것이 아니라, ②두개의 상이한 이념을 믿는 집단이 조직화되어 국가의 지배권을 놓고 싸우기 때문이다. 이 두개의 이념이란 ⓐ이념적 성격이 부여된 한국형 내셔널리즘과 ⓑ정치적 자유주의 간의 충돌이다. 전자는 민주당의 이념이며, 후자는 국민의힘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기초다. 원래 양자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중국이나 인도, 러시아와 미국처럼 지리적인 요인에 의해 거대 제국으로 성장한 나라가 아닌 이상, 분쇄지대에 위치한 모든 나라들은 내셔널리즘을 국가 구성의 최소 단위로 삼는다. 그리고 이 내셔널리즘의 틀 안에서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지를 놓고 보수와 진보로 나뉘게 된다. 전자는 공동체의 합의를 중시하고, 후자는 이념적 지향성을 중시한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3김 시대까지 우리 정치는 대체로 “국가운영에 대한 이념적 합의” 아래 지역주의 정당의 싸움이 지속됐으며, 고려·조선 시대에나 쓰일 법한 지역주의 언어는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한 채 정당 정치의 근간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주의에 기초해 세워진 나라에서 보수주의자들을 이길 수 없던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지역주의 대신 내셔널리즘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내셔널리즘에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해버리는 전략을 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의 조직된 강령이나 사상이 없는 민주당은 여러 정당의 정책을 받아들일 뿐, 이 같은 정책들의 내적 통일성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나아가 민주당이 자신들의 지지층이라는 “시민”의 실체 또한 명확하지 않다. 시민이란 무엇인가? 민주당이 말하는 시민은 서울과 그 주변부로 이루어진 메가폴리스에 사는 자들인가? 아니면 지방에 위치한 도시민들도 포함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국에 흩어진 지역 연고가 없는 개별화된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것인가? 도대체 누가 시민인가? 민주당은 이 문제에 대해 단 한번도 명확한 대답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사실상 민주당을 보노라면 정체성이 혼란하다는 말 외에 무엇이라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모를 때가 많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 또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보수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일제의 민족 억압과 우파 독재 시절 생긴 공동체의 상처를 달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념화된 내셔널리즘이 대다수 국민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보수 정당이 이 같은 아픔을 달래지 못한 것도 한몫 했다고 봐야한다. 또한 보수주의는 내셔널리즘 공동체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선으로 여기는데, 과거 우리 보수정당은 상대방의 존재를 말살하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보수주의적 철학이 없는 집단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보수이기에 상대방의 이견을 경청하고, 공동의 가치를 우선시해야 하는데, 과연 공동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보수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우리 보수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적 정당성만을 믿은 나머지 수십년간 하나된 가치를 창출하는데 실패했으며, 이 실패는 민주당이 내셔널리즘 국가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는 주된 요인이 됐다.
따라서 한국 정치의 혼란을 종식시키고자 한다면 통일된 내셔널리즘 국가를 먼저 건설해야 한다. 내셔널리즘과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한, ⓐ이념화된 내셔널리즘과 ⓑ내셔널리즘을 배척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대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 젊은 세대는 통일을 멀리하지만, 정작 분단은 오늘날 한반도가 다른 나라보다 갑절의 정치적 혼란을 겪는 가장 근본적인 지정학적 요인이다. 공동체를 하나로 조직할 수 있는 “국가운영에 대한 이념적 합의”에 입각한 새로운 국가체제가 등장하지 않는 한, 이런 극단적인 대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분명한 사실은 주체사상도 정치적 자유주의도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새로운 나라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국가운영에 대한 이념적 합의”가 필요하며, 이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위치한 교두보라는 우리의 지정학적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 솔직히 어떤 기치관 또는 이데올로기가 선택될 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가치관 또는 이데올로기에 기초해 헌법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으며, 이와 같은 새로운 헌법은 결국 한반도에 새롭게 등장할 연방제 국가의 성격을 결정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중국이나 베트남, 러시아 같은 전제주의적 성격의 대륙형 국가가 될 수 있으며, 반대로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서구식 해양형 국가가 될 수도 있다. 이 문제에 있어 나에게는 한 표 행사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다. 결국 이는 한국 땅에 사는 5천만 “국민”과 북한 땅에 사는 2천만 “동포”의 선택에 달려있다.
만일 국가를 하나로 조직할 “국가운영에 대한 이념적 합의”를 선택했다면, 그 다음 작업으로 우리는 지자체와 지역주의 정당이 최대한 많은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용인해야 한다. 한반도의 공간적 특징상, 공동체가 하나의 이념적 가치관에 기반한 통일을 이룩한 다음, “필연적으로”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당활동이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3김 시대에 지역주의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6공화국 초 국가 운영 철학이라는 이념적 문제에 있어서만은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냈기 때문이다(정치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 그리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가치 안에서 지역주의 정당이 정책 문제로 다투던 상황에 익숙한 장년층이 보기에 오늘날 이데올로기 주도권을 가지고 다투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공간적 특징을 고려할 경우, 지역주의는 필연적 현상이다. 우리는 아무런 철학 없는 지역주의를 경계해야하지, 지역주의 그 자체를 적대시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한국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당 형태에 가까웠던 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민주당,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과 같은 정당이 아니었을까 싶다. 비록 당대에는 지역주의와 매카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지역주의와 이데올로기, 통치철학이 적절한 배합에 따라 결합된 이 정당들은 그야말로 한반도의 공간적 특징이 정당 정치에 반영될 때, 어떤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애석한 점은 이 같은 실험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재의 DJP 연합으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비록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국가운영에 대한 이념적 합의” 차원에서 상당히 일치된 모습을 보여왔으며, 이 같은 일치된 이념적 틀 안에서 지역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 대결을 펼쳐왔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징은 이들로 하여금 지역주의 정당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서구식 정당체제를 원하는 이들(실상 비판자들조차 서구 지역주의와 정당 정치의 상관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였다)의 비판 대상이 됐다. 비판자들은 이데올로기로 일치된 강력한 전국 정당체제를 원했다. 실상 이 같은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전국 정당은 미국·중국·러시아·인도와 같은 공간 중심부가 분명한 제국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특이한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같은 특수성을 한반도도 갖추고 있다고 믿거나, 지리적인 요소가 공간에 미치는 영향력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정당 형태를 실험하고자 했다. 이 새로운 정당, 탄생할 때부터 공간이 현실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부정한 정당이 바로 열린우리당이다.
노무현 대통령 이래, 민주당이 진행한 정치적 실험의 성패 여부를 떠나, 이들은 분명 우리 정당사상 한 획을 긋는 정당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더 정확히 말해 이승만 대통령 때 자행된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이 아니고서야 경험할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서구 정당체제에서도 나름의 당위성을 인정받는 지역주의 언어는 이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상호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계급 투쟁만이 부각되어버렸다. 물론 계급 투쟁이 오늘날에 이르러 생명력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공간적 특징에 따라 계급 대립의 강도와 밀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망각했다(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대립 강도가 모두 균일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결국 우리는 매 5년마다, 다른 나라에서는 개헌 또는 내란 수준의 정치적 대립을 대선이라는 정치적 이벤트를 빌미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칼싸움만 나지 않을 뿐, 나라가 정상일리 없다).
따라서 하나의 가치관 또는 사상적 틀에 입각한 “국가운영에 대한 이념적 합의”를 확립한 다음, 우리가 할 일은 사뭇 명확하다. 한반도의 공간적 특징을 인정하고, 지역주의 언어를 회복하며, 나아가 강력한 행정권한을 가진 지자체로 하여금 지방을 운영하게 함으로써, 계급 투쟁 강도와 밀도를 지역 단위로 관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중앙정부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각 지자체가 (외교·국방 등 소수 분야를 제외한) 중앙정부에 준하는 행정권한을 주어 계급 투쟁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대립을 지자체 단계에서 소멸시키는 것, 그리하여 중앙 행정부는 군대와 외교 등 국가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예산 심의·감독은 국회에 맡기며, 실제 행정 집행은 지자체가 하는 분권화分權化된 연방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국회의 운영 또한 기존의 양당제가 아닌 다양한 이념과 정책, 지역 이권이 조합될 수 있는 다당제가 좋으며, 못해도 5-6개의 정당이 난립하는 구조가 가장 좋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① 한국의 정치적 문제는 공간적 구조와 정치적 구조의 불일치에서 발생한다.
② 한국의 지리적 복잡성 때문에 우리가 직면한 정치 문제는 공간적 차이에 따라 강도와 밀도가 균일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③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힘을 결집해야 하는 몇몇 영역을 제외하고는 지자체의 권력을 키워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
④ 따라서 남북한 연방제 통일보다 더 고차원적인 연방제를 목표로 국가를 다시 설계하도록 조언하는 것이 오늘날 지정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그리고 이것이 지정학의 학문적 목적성에 부합하기도 하다).
즉 우리의 정치 체제를 고려 시대 또는 삼한三韩식 연맹체 형태로 회귀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지정학적 특징에 가장 부합한 정치체제라고 필자는 생각하는 바다.
혹자는 한국이 독일과 같은 방법을 통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 믿지만, 이는 한국과 독일의 공간적 특징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중국·러시아·인도와 같이 독일도 동유럽 대평원이 만든 북부 대평원지대가 있으며, 베를린은 이 평원지대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명확한 공간적 중심부가 있었기에 독일은 통일 대업을 이룰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중심부가 없다. 유사한 곳이라 해봐야 북한의 대동강 유역뿐인데, 북한의 종합 국력을 고려할 경우, 이들이 통일을 주도하리라는 구상은 한 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다. 결국 한반도를 통일하고자 한다면 한국정부가 주도하는 연방제 통일만이 가능한데,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상, 이 같은 중심부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역은 ①평택 평야와 아산만 일대, 그리고 ②호남평야 밖에 없다. 연방제 통일이 되더라도 남북한의 사실상 분단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기에, 서울은 적합한 선택지가 아니다. 따라서 ⓐ국토 중심부 역할을 할 수 있는 대동강 유역으로 천도하든가(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휴전선 이남 땅에서 적당한 지역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 와중에 우크라이나와 관련해서 미·러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39572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38450
https://newsis.com/view/?id=NISX20220111_0001719923&cID=10101&pID=10100
당연하다. 애초에 우크라이나는 협상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올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현실화되기는 어렵다. 우크라이나도 오랜 내전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은 병력이 15만 명이나 되기에, 고작 10만 명 가지고 우크라이나에 침공하는 것은 어렵고, 못해도 20-30만 명은 동원해야 한다고 본다. 단지 우발적인 충돌이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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