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LPG 가격 인상이 도화선이 된 이 사건은 알마티, 누르술탄 등지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으며, 시위대는 옛 수도 알마티 공항을 접수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궁까지 습격했다. 그러나 어제(6일 오전) 러시아가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구성원 자격으로 카자흐스탄 시위 진압에 가담하면서 토카예프 정부(시위가 절정에 달하자 토카예프 대통령은 내각을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는 점차 정국 주도권을 되찾고 있다. 정부군은 정부 청사와 공항을 다시금 장악했으며, 2천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를 체포했다(사상자는 천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022/01/06/PPCOFOQ4TFDFTDYOVBOHW3O564/?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
https://www.yna.co.kr/view/AKR20220106134952009?input=1195m
https://www.yna.co.kr/view/GYH20220107000200044?input=1363m
혹자는 이번 시위가 러시아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 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이번 시위 진압 과정에서 러시아는 적시 군사 개입을 통해 중앙아시아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확인시켜줬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쪽은 나자르바예프의 중립주의 노선이 아닐까? 소련 해체 이래, 나자르바예프는 카자흐스탄의 독재자로 오랜 세월 군림했지만, 그를 막연히 친러 성향 정치인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나자르바예프는 서쪽으로는 터키와 유대 관계를 맺고, 동쪽으로는 중국과의 국경 분쟁 문제를 매듭지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자원 공급망 재편에 참여함으로써 베이징의 신임을 얻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군과 나토에게 물류 창고와 공항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미국·영국 등 서방세계와 “초원의 독수리” 훈련을 통해 이들과의 군사 협력까지 강화했다. 이런 나라를 벨라루스·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아르메니아와 같은 친러 국가(실상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나라들이다)라 정의하기란 힘들 것 같다. 필자는 이 같은 카자흐스탄의 외교노선을 친러에 기초한 중립주의라 정의하고 싶다.
https://world.huanqiu.com/article/4656kHXxYVX
그러나 중·러 군사협력체가 형성되면서 카자흐스탄의 중립주의 노선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와 베이징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게 자신들에게 충성 서약할 것을 지시했으며, 이들은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이 같은 요구를 수용해야만 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베이징·모스크바와 달리 반 탈레반 군벌 아흐마드 샤 마수드에게 무기를 지원한 라흐몬은 2021년 12월 중국·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힘쓸 것을 약속했으며, 카자흐스탄은 다시금 미군에게 어떤 기지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야만 했다. 중·러 군사협력체가 이처럼 막강한 지정학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요인을 살펴보면 우리는 중앙아시아 5개국과 아프가니스탄 등 유라시아 내륙지대 국가와 바다를 연결하는 4개국이 중·러 군사협력체 당사국(중국, 러시아, 이란)이거나 중국과 사실상 동맹관계를 맺은 나라(파키스탄)임을 알 수 있다. 지리적 포위망이 한 국가의 정치적 선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스파이크먼은 《평화의 지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포위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자원과 잠재적 실력이 포위당한 나라에 비해 크고, 포위당한 나라를 지킬 아무런 자연 장애물이 없으면, 이 같은 포위망은 한 나라에게 있어 진정한 위협이라 말할 수 있다.
상술한 명제의 예시로 스파이크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유고슬라비아를 들었는데, 체코슬로비카와 폴란드 모두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면에서 달려오는 독일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빠르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지리의 힘이 한 국가의 안보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삼면 포위도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국가들의 상황임을 고려하고 중앙아시아 5개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다시금 생각해보자. 이들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 않는가?
이 같은 중·러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카자흐스탄은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 제3의 물류 운송로를 모색했으며,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에 참여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에즈카즈간-바이네우 철도와 중국-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 철도, 악타우에서 출발하는 카스피해 항로는 바로 이 같은 카자흐스탄의 의중이 강력히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운송루트의 개통으로 카자흐스탄은 러시아 시베리아 철도와 중국을 거치지 않고도 흑해와 지중해로 나아갈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반러 성향이 강한 아제르바이잔과 (에르도안 사임 후) 언제라도 러시아로부터 등 돌릴 수 있는 터키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OTS는 바로 이 같은 나자르바예프를 위시한 카자흐스탄 정치인들의 포위망 돌파 의지와 터키의 중앙아시아 진출 야욕이 결합된 지정학적 기형아라 할 수 있다.
https://letrleter.tistory.com/m/144
따라서 이번 시위 진압에 러시아 군대가 개입했다는 것과 친러 국가인 키르기스스탄이 카자흐스탄 정부 지지를 선언한 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번 시위의 결과가 ①러시아의 대 카자흐스탄 영향력 강화와 ②나자르바예프의 중립주의 노선 전면 폐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카자흐스탄의 인구구성(러시아인 400만)이나 이 나라 엘리트들의 친러 성향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번 시위 진압 이후 사후 처리를 명분으로 러시아 군대가 카자흐스탄에 오랫동안 주둔하게 될 경우, 러시아의 통치를 식민 지배로 규정하는 우즈베키스탄은 살길을 찾아 중국과 이란, 터키와의 관계 강화에 힘 쓸 것이며, 베이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 앞으로 베이징 주도의 신-실크로드는 기존 카자흐스탄 경유 루트에서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경유 루트로 바꿀 가능성이 있으며(실제로 작년부터 베이징은 키르기스스탄 경유 철도 공사 사업 검토에 들어갔다), 이는 북방계 투르크어족과 남방계 투르크어족 국가 간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지정학적 장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번 시위는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 “캉글리 벨트”(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와 중국·이란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호라산 벨트”(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국가 간의 대립을 알리는 서막이 될 것이다.
https://letrleter.tistory.com/m/85
갑자기 Q대에서 공부했을 당시 같은 반 카자흐스탄 친구 A가 생각난다. 그녀의 삼촌은 당시 카자흐스탄 국회의원이었는데, 그렇다고 그녀가 동기들에 비해 어떤 특별한 혜택을 받은 것도 없다(그런 혜택을 받기에는 Q대에 재학 중인 중앙아시아·인도차이나 지역 장·차관 아들 딸들이 너무 많았다). 오히려 그녀는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여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고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갔다. 나는 지금도 그녀가 푸틴을 자기 나라 대통령처럼 말하는 장면이 생각나는데(그리고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내심 중국인 무시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시위 진압 과정을 보면서 러시아의 개입이 한편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모르는 민중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던 것은 아니었나 반성해본다. 하지만 권위주의 통치자들은 민중들의 요구에 쉽게 응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그들은 민중을 내셔널리즘의 기치 아래 결합시키고 반대파를 “서구세력의 꾀임에 넘어간 민족 반역자”로 매도하는데 능숙하다. 틀림없이 러시아 해외정보국(SVR)은 이 “민족 반역자”의 자금줄이 서구 인권 단체임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증명할 것이며, 카자흐스탄에 그나마 남은 서방세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다(이미 아래 링크보면 알겠지만 진작부터 준비 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러시아군의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 진압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미국을 바라보며 한때 중앙아시아 내륙 지대까지 군사기지를 설치했던 이 나라가 이제는 내륙지대로의 접근조차 차단된 절반의 세계만을 지배하는 국가로 전락했음을 알 수 있다.
https://m.sohu.com/a/460701994_115239/?pvid=000115_3w_a
물론 새로운 세계질서의 지배자가 누가될지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어떤 세계질서라 할지라도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인도 4개국은 빠지지 않고 등장할 것 같지만 말이다. 이는 스파이크먼이 《평화의 지정학》에서 예측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기도 한다. 단지 이들의 조합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 현 단계에서 예측하기란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세계질서를 예상해볼 수 있다.
1. 프리마코프-두긴식 세계질서(현행 세계질서, 해양세력 VS 대륙세력)
미국·인도 VS 중국·러시아
2. 키신저-브레진스키식 세계질서(러시아의 서진과 인도의 해양 진출이 가속화될 시 가능한 세계질서, 해양세력+대륙세력)
미국·중국 VS 러시아·인도
어떤 세계질서를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워싱턴과 베이징, 모스크바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번 반정부 시위는 카자흐스탄 내부의 권력 구조와도 연관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카자흐족은 카자흐 한국 시절부터 주즈(жүз)라 불리는 부족공동체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①알마티의 대주즈, ②시르다리야 평원의 중주즈, ③카스피해 연안의 소주즈로 나뉜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 시절, 지리적인 요인으로 친러 성향이 강한 소주즈 출신들이 실권을 잡았으며, 이에 반해 청나라와 연합해 마지막까지 러시아 제국에 저항한 중주즈 출신들은 차별과 억압을 받았다. 대주즈 출신들 또한 상징성만 가지고 있을 뿐, 실권은 소주즈 출신들에게 빼앗긴 상황이었으며, 이 같은 상황은 소련 해체될 때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대주즈 출신 나자르바예프가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친러 성향의 소주즈 출신들을 배척하고 대주즈와 (친중이었던) 중주즈 출신들을 등용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소주즈 출신들이 권력 중심부로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됐다. 아울러 나자르바예프는 이런 소주즈 출신들이 사는 카스피해 지역의 원유 등을 중국과 미국에게 헐값으로 넘기면서 측근들과 개인적인 부를 축적했지만, 정작 소주즈 출신들은 계속된 가난 외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올해 1월 카자흐스탄의 반정부 시위는 이런 소주즈 출신들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 토카예프는 러시아군을 불러들임으로써 나자르바예프와 그의 권력을 지탱하던 대주즈-중주즈 연합을 타도하고, 친러 일색 정권을 세웠으니, 이제 카자흐스탄의 중립주의 노선은 과거의 일이 될 것 같아 염려된다. 당연하지만 이번 반정부 시위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자들은 미국과 EU, 장기적으로는 중국과 중주즈 출신들이라 할 수 있다(오늘 카자흐스탄 친중파 거두이자 나자르바예프의 측근인 카림 막시모프 전 국가안전위원회 주석이 체포됐다). 아마도 중국은 자국의 대 중앙아시아 영향력을 이용해 그나마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중즈즈 출신 정치인들을 몇 명 살리려 할 것 같다.
2022년 1월 8일 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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