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스파이크먼의 반월지대(림랜드) 이론에 대한 단상

계연춘추 2021. 8. 3. 17:30

스파이크먼의 저서 《평화의 지정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외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도서로 미국 70년 외교사(1944-2016)를 결정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스파이크먼이 설계하고 키신저와 브레진스키가 틀을 잡은 미국의 반월지대(림랜드) 개입론은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종언을 고했지만(더 정확히는 자이한의 학설이 유행하면서 미국에서 더 이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휴지통에 버린 스파이크먼의 학설을 중국 학자들이 자국에 소개한 다음, 자신들의 지정학 패권을 논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여전히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만약 스파이크먼이 트럼프 시대를 목격했다면 통곡했을 것이다).

매킨더와 스파이크먼의 심장지대 비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의 팽창, 그리고 몰락을 목격한 스파이크먼은 매킨더의 심장지대 이론을 비판하며, 반월지대 이론을 들고 나왔다. 반월지대 이론이란 심장지대(내륙 하천과 초원, 툰드라로 이루어진 지역)와 바다 사이에 위치한 계절풍 지역으로 카르파티아 서쪽 유럽 대륙과 히말라야 산맥 남쪽의 인도 아대륙과 인도차이나, 그리고 중국 내지를 뜻한다. 반월지대의 설정방법에 있어 스파이크먼은 매킨더식 설정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강을 중시한 매킨더와 달리 그는 산맥과 늪지대야말로 정치적 활동을 결정하는 지리적 요소라고 이해했다. 오히려 그는 강물은 별도의 군사시설 공사 없이 방어선 역할을 할 수 없는 고로 강물을 경계로 지정학 권역을 설정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스파이크먼의 학설을 따를 경우, 술레이만 산맥까지 내려오는 매킨더의 심장지대는 곧바로 힌두쿠시 산맥까지 후퇴하게 된다. 실제로 내륙 하천을 중시한 매킨더는 헬만드강 유역을 심장지대로 묘사했지만, 스파이크먼은 카이바 고개 북쪽 힌두쿠시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을 경계로 북쪽은 심장지대, 남쪽은 반월지대라 묘사했는데, 이 경우 헬만드강 유역은 반월지대에 속하게 된다(단순히 현대 국경선과의 일치도를 비교해보면 하천을 중시한 매킨더보다는 산맥을 중시했던 스파아크먼에 더 근접하기는 하다).

매킨더식 팽창구상과 스파이크먼식 팽창구상

이처럼 반월지대의 지리적 경계선을 확장한 스파이크먼은 미국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했던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 모두 반월지대에서 일어났음을 상기시키며, 반월지대야말로 세계 패권의 열쇠가 숨어있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반월지대에 적절히 개입하여 이 일대를 통합하는 거대 정치세력이 나타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스파이크먼의 외교관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후 미국은 바다에서 반월지대로 진출하는 군사작전(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코소보 사태)을 통해 반월지대를 직접 통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해양 진출을 막고 전세계적인 패권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스파이크먼의 구상은 키신저와 브레진스키 등 지정학자들에 의해 구체화되었는데 대체로 ①유라시아 대륙 동부가 하나의 정치세력에게 통합되는 것을 막고(중국), ②유라시아 북부가 반미적인 세력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막으며(러시아), ③유럽 대륙에 대한 영향력을 꾸준히 유지할 뿐만 아니라, ④러시아의 중동 지역으로 남하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미국을 소련이 해체되자마자 나토 동진을 시작해 동유럽이 러시아의 세력권에 재차 편입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에 직접 진출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군사적인 힘으로 저지했다.

이와 같은 세계패권 유지를 위해 매년 천문학적인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는데, 미국 엘리트 계층과 달리 스파이크먼의 구상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 일반 시민들은 프리드먼-자이한 계열의 학설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이 설사 반월지대에 개입하지 않더라도 자국의 석유, 천연가스와 같은 자원 수급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다른 나라들이야말로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구걸해야 한다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자이한 계열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선출한 트럼프 대통령은 70년 동안 이어온 반월지대 개입론을 180도 돌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오늘날 우리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보듯이) 미군이 철수한 빈 자리를 중국과 러시아가 차지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만일 사후세계가 있다면 스파이크먼은 트럼프와 자이한을 보고 통곡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1944년 이래 미국이 독점하던 반월지대에 대한 패권을 아무런 대가 없이 중국과 러시아에게 넘겨줬기 때문이다.

실은 나 또한 스파이크먼의 반월지대 이론에 비판적이기는 하다.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매킨더 학설에 대한 왜곡 내지는 몰이해다. 매킨더는 심장지대의 접근성이 바다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관통하는 교통 인프라가 건설되면, 이 지역의 지배자가 세계 패권을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 때문에 그는 러시아 제국의 시베리아 철도를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제로 나치 독일과 일본의 실패는 심장지대에 지정학 요새를 건설한 세력(소련)을 이길 수 없다는 독일의 지정학자 하우스호퍼 가설이 맞았음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스파이크먼 가설 또한 생각해보면 결국 반월지대를 차지한 세력이 심장지대와 해양의 자원과 접근성을 이용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는 말이니, 결과적으로 매킨더의 심장지대-해양세력 충돌 구조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도 어렵다. 아울러 아시아에서 심장지대와 반월지대의 지정학적 충돌은 구조적이며, 영속적인 측면이 있다. 반월지대에 사는 중국과 인도인들은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함으로써 심장지대 유목민들과 싸울 수 있는 비용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적 수단을 통해 이들에게 복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심장지대의 강과 산맥 같은 자연 환경을 이용해 군사 거점들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 교통로를 통제함으로써 유목민족들의 생명줄을 손에 넣고자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심장지대-반월지대 통합제국 (소련과 같은 유럽식 다민족 제국과 중국과 같은 근대적 중화제국 모두 여기 포함된다)은 강력한 통제력을 자랑하는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했는데, 이는 이들의 국경선이 경제 생산방식이나 자연환경의 유사성이 아닌 지정학적 수요에 따라 확정된 것이기 때문에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중앙정부만이 제국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매킨더가 우려했던 심장지대 제국과 해양세력 간의 정치적 충돌은 미∙소 냉전, 그리고 아시아를 둘러싼 미∙중 지정학 대립으로 구현되었으니, 매킨더에 대한 스파이크먼의 비판은 부당함을 넘어 섣부른 것이었다고 평가하는 편이 옳다고 본다.

여담이지만 《평화의 지정학》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가치에 대해서 두 가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① 이 지역은 소련, 중국과의 전면전을 상정할 시, 공군기지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제5장 “안보전략”).

② 이 지역은 중국과 소련에게 포위된 형국이기에 이 지역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시, 지킬 수 없다(제3장 “서반구의 위치”).

스파이크먼의 주장을 따를 시, 우리는 이 지역이 쿠르스크 돌출부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적군의 대공세가 펼쳐질 경우 막대한 희생을 각오하거나 지킬 수 없는 지역”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결론이야말로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스파이크먼은 산맥과 바다, 그리고 늪지대를 경계로 지정학적 경계선이 확정된다고 믿었는데, 한반도 전역에 펼쳐진 논두렁과 다층 구조를 이루는 산맥이야말로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지켜준 자연 경계선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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