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김병기 씨는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방송에서 《광개토왕릉비》 조작설을 다시 제기했다. 이진희 씨 이래 《광개토왕릉비》의 일본 관동군 조작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막연히 서법 특징만을 가지고 위조설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일 아닌가 생각된다. 이후 최연식 씨가 《광개토왕릉비》의 □婆를 반파라 주장하면서 한국 학계는 또 다른 논란에 휩쓸리게 됐다.
그래서 필자는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오늘 베이징대 고적소에서 광개토왕릉비 탁본 사진을 살펴보았다. 탁본에 대한 정보를 보니 광서 연간 제작한 것이고, 이끼를 제거하기 이전에 찍은 탁본이라 적혀 있었다. 탁본의 글자 상태는 아주 좋지 않으며, 베이징대 古籍所 관계자들도 도대체 왜 이런 탁본을 보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만큼 이끼를 제거하기 이전에 비문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뜻하기도 한다. 아마 이끼를 태우지 않았다면 몇몇 글자는 육안으로 판독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탁본은 이끼 때문에 판독하기 어려웠지만 다행히도 신묘년 조 부분은 육안으로 판독 가능한 내용이 많았다. 아래는 필자가 판독한 신묘년 조 부분이다.
……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彑破百殘(문자가 파손되어 판독 불가)羅 以為臣民
세간의 소문과 달리 이끼를 제거하기 이전의 탁본이라 해도 신묘년 조 기사 내용은 비교적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김병기 교수가 원래는 “입공어[入貢於]”였다고 주장한 부분(네모 칸)은 첫번째 글자는 육안으로 판독이 불가능하고, 두번째 글자는 彑자와 유사한 필획이 남아 每자나 海자일 가능성은 있어도, 貢자나 伴자일 리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세번째 글자인 破자는 글자의 형태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금속 기구로 긁은 흔적도 없어 비문 조작설이 애초에 근거 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왜 사람들이 《광개토왕릉비》 조작설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 비문의 글자가 조작되지 않았다면, 신묘년 당시 왜인 세력이 어떤 형태로든지 한반도 남부에 군사적으로 개입해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음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북쪽에는 낙랑군, 남쪽에는 일본의 개입이라는 짜증나는 고대사를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며, 이 때문에 일부 한국 학자들은 지금도 《광개토왕릉비》 위조설을 주장하며 왜 세력의 한반도 남부 개입을 부정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도 그렇고, 영남 지역에서 발견되는 왜인 계통의 묘장은 5세기 무렵 왜인들이 실제로 한반도 남부에 개입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왜인의 개입이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려는 가야 연맹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왜인 단독 행동인지는 연구가 필요하지만, 나는 신라의 힘을 빌려 포상팔국의 난을 제압한 가야 안라국이 자국의 세력을 한반도 남부 전역으로 확대하고자 왜인을 끌어들이고(실제로 백제는 근초고왕 대에 왜인을 끌어들여 가야와 마한 잔여세력을 복속한 바 있다), 왜인들도 한반도 남부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안라국의 이와 같은 요청에 응해 군대를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영산강 일대의 마한 잔여세력은 다시금 독립하여 친 가야-왜 세력으로 전환한 듯하다. 결국 백제는 5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을 직접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일본의 한반도 남부 개입설을 비교적 긍정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