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초금의 《翰苑》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구당서∙장초금전》에 따르면 그는 장도원의 족자로 이부시랑, 추관상서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翰苑》 30권과 《신계》 3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미 당나라 때부터 실전되기 시작했던 것을 아닐지 의심된다. 《신당서∙예문지》를 보면 자부 유서 서목에 《翰苑》 7권이 등장하는데, 집부 총부 서목에 또 보면 《翰苑》 30권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혹자는 장초금 동명이인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필자의 생각을 말하자면 사람 이름이야 같을 수도 있지만 書名까지 같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 같다. 다만 당대 문인들 가운데 자신이 시 쓰는데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유서를 직접 만드는 일이 흔했다. 예를 들자면 원진의 《원씨류집》 300권, 백거이의 《백씨경사사류》 30권, 온정균의 《학해》 30권 등이 있다. 비록 《한원》 30권은 유실됐다지만 《신당서∙예문지》에 함께 나열된 문집의 성격으로 보아 문인들의 唱和詩集이거나 일정한 규칙에 따라 五七言詩를 수록한 詩選集일 가능성이 높은데, 《翰苑》이라는 이름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북문학사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장안 궁전의 관료들과 북문학사들이 한림원에서 함께 읊은 시를 기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翰苑》 30권과 연동된 유서 7권본이 나오고, 장초금 생전 이 책의 이름을 정하지 않아 후세 사람들이 막연히 《한원》이라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오늘날 유행하는 《翰苑》은 일본 학자들이 輯佚한 것인데, 번이부만을 모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살펴보면 왜 이 책이 실전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한서》, 《후한서》, 鱼豢 《위략》, 《괄지지》 등 문헌에 기록된 이민족 관련 기사를 한데 모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연 당대 문인들 입장에서 보면 《후한서》를 읽는 것이 차라리 빠르고 정확하지 않겠는가? 또한 이 책을 살펴보니 《高麗記》의 기록을 많이 인용했는데, 아마도 《구당서∙경적지》와 《신당서∙예문지》에 나오는 《奉使高麗記》 1권을 뜻하는 것 같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영류왕기》에 보면 당태종이 보낸 진대덕이 고구려의 산천을 살핀 다음 황제께 이를 상세히 보고했다 하는데, 대다수 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집필된 책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곧바로 수나라 때 사람 배구의 《高麗風俗》이 나와 어쩌면 그보다 앞선 시대 사람이 기록한 책일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기존 목록 문헌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숙신기》라는 책도 보이며, 육홰 《鄴中記》의 실전된 기록도 몇 자 보인다.
아울러 《한원》 輯佚本을 살펴보면 《括地志》의 실전된 내용도 보이는데, 이는 필자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오늘날 학자들이 사용하는 《括地志》는 하차군 선생이 輯佚 및 校讎한 《〈括地志〉輯校》인데, 이 책에 빠진 내용도 몇몇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에 빠진 내용을 보충하는데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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