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패권국의 조건과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해

계연춘추 2021. 3. 11. 17:09

대체로 특정 지역에 대한 배타적 권리 내지는 정치, 경제적 우위를 가진 나라를 패권국이라 한다. 일단 패권국을 두 유형으로 나누어야 할 것 같다.

①“세계섬” 지역을 장악한 내륙 패권국
②해상 무역항로를 장악한 해양 패권국

원래 전통적 의미의 패권국은 “세계섬” 지역의 무역로를 장악한 나라를 뜻했으나, 세계 경제 규모에서 해상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면서 세계 무역로를 장악한 해상 세력 또한 패권국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따라서 내륙 패권국과 해양 패권국에게 요구되는 조건 또한 다르다.

일단 우리는 아래와 같은 조건을 충족하는 국가를 내륙 패권국이라 칭할 수 있다.

①“세계섬”에서 경제적 가치가 높은 지역을 통치할 뿐만 아니라, 자국이 직접 지배하는 영토가 바다에서 심장지대까지 이어져 있다.
②주변국에 대한 강력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③교통 인프라 건설을 통해 내륙지대 물류망을 장악한다.
④석유, 천연가스, 희토류 등 내륙지대에서 생산되는 전략 자원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⑤“세계섬”에서의 패권을 바탕으로 해상 무역로를 위협한다.

반대로 해양 패권국의 경우, 아래와 같은 조건을 만족해야만 패권국이라 인정할 수 있다.

①바다와 인접한 상당수 해양무역 거점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②주요 항로를 지킬 수 있는 거대 규모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적국의 해양무역 거점도 공격할 수 있는 종합적 군사력을 갖추어야 한다.
③해상 무역로를 장악한 정치적 영향력을 기초로 “세계섬”에서 자국에 위협이 될만한 제국의 출현을 막고, 이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한다.
④원활한 해상 교역을 위해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자국 중심의 화폐 체계를 확립한다.
⑤해양 패권을 바탕으로 “세계섬” 심장지대까지 진출할 수 있어야 한다.

상술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내륙 패권국과 해양 패권국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다르다. 내륙 패권국은 내륙 지대 자원과 물류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 행사 여부에 따라 결정되며, 반대로 해양 패권국은 자국 중심의 금융 체계 확립과 무역로 장악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평가하면 우리는 그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트럼프 시대 미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후퇴를 거듭했을 뿐만 아니라, 동지중해 연안 지역을 러시아에게 사실상 “헌납”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 철군 결정으로 중국 서부 국경지대의 군사적 압력을 줄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솔레이마니를 암살함으로써 “세계섬”의 강자인 중국, 러시아, 이란 3개국의 반미 군사 연대 결성까지 초래했다. 달리 말해 트럼프는 자국에 저항할 수 있는 정치∙군사적 연대의 출범을 묵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추겼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울러 러시아의 동지중해∙홍해 진출과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과 인도양 진출은 해상 무역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임이 분명한데 이를 저지하는 어떤 스텐스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권 문제를 부각시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추구하던 수지 정부로 하여금 친중 노선으로 갈아타게 만들었으며, 스리랑카에서는 시리세나 정권이 몰락하고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라자팍사 가문이 권좌를 차지하도록 방치했다. 이처럼 패권국이 자발적으로 특정 지역에서 물러나는 경우는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아케나톤의 시리아 철수와 명나라 선종의 만리장성 이북 지역 철수 외에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명나라 선종의 만리장성 이북 철수조차 군사적 효용성에 비해 경제적 비용이 너무도 커서 철수했음을 생각한다면, 트럼프의 중동-인도양 철수는 아케나톤의 시리아 철군 이후 3400년만에 일어난 인류 역사상 두 번 없을 바보 같은 짓이 아니라 할 수 없다(둘 다 시리아에서 철군한 것도 재미있다).

따라서 트럼프 이후 미국을 패권국이라 부를 수 있을까? 비록 금융∙군사∙과학기술 분야에서 미국의 우위는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패권이 지정학적 개념임을 생각하면, 나는 트럼프 이후 미국을 패권국이라 부를 수 없다 본다. 트럼프 시대 미국은 “세계섬”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꾸준히 (그리고 단계적으로) 줄여 왔으며, 심지어 “세계섬” 심장지대(내륙하천 지역)로 진격할 수 있는 유일한 군 부대였던 아프가니스탄 주둔군까지 철수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세계섬” 지역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스스로 포기할 것임을 천명했다. 러시아는 그를 비웃었고 중국은 그의 바보 같은 결정에 숨쉴 겨를을 가질 수 있었다. 이어 진행된 러시아의 동지중해∙홍해 거점 확보와 중국의 인도양 진출 가속화는 해상 무역로에 대한 미국의 배타적 권리를 위협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음에도 트럼프 지지자들은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그의 바보 같은 결정을 지지했다. 사실상 트럼프 시대에 이르러 미국은 스스로 패권국 지위를 포기했던 것이다.

따라서 해양 패권국의 조건 가운데 미국은 이미 ②와 ④을 제외하고는 딱히 해당 사항이 없다(물론 미국은 여전히 세계 제1 강대국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노련한 외교 정책자들은 미국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지만, 반미 구호 아래 하나로 뭉쳐버린 중국과 러시아, 이란 3개국과의 정면충돌은 미국에게도 경험해보지 못한 도전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패권은 잃어버리기 쉽지만 다시 회복하기는 실로 어렵다. 실상 불가능하다 봐야 하는데 미국의 군사적 우위가 이를 뒤집을만한 변수를 만들 수도 있기에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가 망가트린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우선 동맹과의 관계를 재점검하고, 미국에 대한 이들의 지지를 확인한 다음에서야 트럼프와는 다른 외교 정책을 제시할 것 같다. 이 기간 동안 중국과 미국의 주요 충돌 지점인 남중국해와 인도양 제국諸國의 정치적 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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