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페리히(1872~1924)의 《경제전쟁과 전쟁경제》에 나오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경제 상황에 대하여
이 책은 헬페리히가 쓴 《세계대전》 제2권 제3부의 내용을 단행본 형식으로 출판한 소책자를 台海出版社에서 다시 재판한 것이다. 역자는 중화민국 시기 유명한 독일어 번역가 王光祈 선생으로 1932년(민국 21년)에 초판본이 나왔으며, 필자가 읽은 재판본은 2019년에 출간된 것이다. 이 책을 다시 출판하는 이유에 대해 편자 曹文靜는 미∙중 관계의 악화로 인해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며, 중국은 전쟁을 두려워하지만 피하지 않는다는 내셔널리즘적 구호와 함께 전쟁 전후의 경제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1914년, 영국은 이미 자국의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독일로 가는 모든 중립국 상선을 감시하기 시작했으며, 미국과 같은 중립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립국의 對德 원자재와 공업용품 수출을 금지했다. 책에서 헬페리히는 영국이 국제법을 어겼다고 비판했지만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 주력부대와 맞서 싸울만한 힘이 없었고, 이 때문에 원양에서 기동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존재해군이 되어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자국 영해만 지킬 따름이었다.
헬페리히가 처음 직면한 문제는 식량 수급이었는데, 당시 독일은 스스로 자급자족하기에 부족한 식량을 가지고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의 식량문제까지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오스만 투르크의 경우, 원래 자국의 식량 생산량이 부족하다 보니 러시아로부터 대량의 곡물을 수입했는데, 러시아가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면서 대 오스만 곡물 수입을 중단한 것이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독일에게 염초, 양모, 금속 등 물자를 제공했지만 수량도 적을 뿐만 아니라, 3B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바그다드 철도는 군용으로 사용되었기에, 하는 수없이 다뉴브강 수운 루트를 통해 물자를 독일로 운송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공업-농업 생산 종사자들이 징병되자, 독일의 농업 생산량은 빠르게 감소했다. 책에서 헬페리히가 나열한 수치는 다음과 같다.
소맥, 호밀: 1650만 t(1913년)→920만 t(1917년) 44.2% 감소
보리: 360만 t(1913년)→200만 t(1917년) 44.4% 감소
귀리: 950만 t(1913년)→360만 t(1917년) 62.1% 감소
고구마: 5400만 t(1913~1915년)→2500만 t(1916년)→3440만 t(1917년)→2550만 t(1918년) 최대 53.7% 감소
이 때문에 독일은 어쩔 수 없이 중립국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야만 했다. 만일 독일 상인들에게 중립국에서 자유롭게 물건을 구매하도록 허용할 경우 물가 상승은 필연적이었기에(당시 중립국 시장의 물가는 독일 군부와 독일 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쟁으로 끝없이 올라가던 상황이었다) 독일 정부는 자국의 수출, 수입을 독점 관리했다. 일례로 독일 정부는 중립국에서의 물건 매입을 독점하는 採購總局을 성립한 다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참여를 요청했는데, 이와 같은 방법은 효과를 발휘해 덴마크 시장의 우지 가격이 37.5% 하락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다르다넬스 해협이 봉쇄당하자 루마니아는 자국의 식량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팔 수밖에 없었지만, 이들은 전쟁 상황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려 했으며 가끔씩 도로 상황을 핑계로 곡물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독일의 수입 규모는 거의 줄지 않았는데, 힐페리히는 아래와 같은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1913년: 108억 마르크
1915년: 71억 마르크 34.3% 감소
1916년: 84억 마르크 18.3% 증가
1917년: 71억 마르크 15.5% 감소
이로 보아 독일의 수입 규모는 전쟁 직전 65.7~77.8% 수준을 유지했는데, 이와 같은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힐페리히는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영국이 아무리 해상 봉쇄를 해도 독일과 인접한 중립국으로부터 수요품목을 계속 수입할 수 있었다. ②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와의 무역 중단에도 불구하고 수입 규모는 오히려 증가했다. 특히나 러시아에서 공급되는 대량의 돼지고기와 우지, 버터, 청어 등은 전쟁 전보다 (오히려) 많이 들어왔는데 헬페리히는 다음과 같은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돼지고기21,600 t(1913년) → 98,200 t(1915년)
우지 54,200t(1913년) → 68,500t(1915년)
마른 버터 26,300t(1913년) → 67,300t(1915년)
청어 129만 8천 통(1913년) → 228만 3천 통(1915년)
물론 영국은 독일이 물자를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가격에 대량 매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도 덴마크에서 물건을 샀지만 결국 독일이 루마니아와 러시아 등지로부터 수요품목을 수입하는 것을 끝내 막지 못했다. 전쟁 직전, 독일은 유럽대륙 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는 후대의 사가들에 의해 독일이 양면전선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필자가 헬페리히의 책을 보면서 느낀 점은 (역설적으로) 독일이 대륙 한 가운데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도 꾸준히 중립국과 러시아 등지로부터 자신들이 삶을 영유하는데 필요한 곡식, 육류 등을 대량으로 매입할 수 있었으며, 이는 독일이 양면전쟁을 치루는 와중에도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입 규모를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이었다.
전쟁 초, 독일은 대량의 실업 사태에 직면하게 됐으며, 정부는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소개소를 운영해 실업률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질수록 국내에서 남성 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운 반면, 여성 노동자의 실업률은 여전히 높았는데 헬페리히는 다음과 같은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수치는 일자리 1개 당 지원하는 남성, 여성의 경쟁률을 뜻한다).
1914년 7월: 남성 1:1.6 여성 1:1
1914년 8월: 남성 1:2.5 여성 1:2
1915년 4월: 남성 1:1 여성 1:1.7
1916년 10월: 남성 1:0.9 여성 1:1.4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 까닭은 당연 전쟁 중이었기에 징집 가능한 남성은 모두 전선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혹자는 전쟁 발발 시, 여성을 동원하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산업 일선에서는 체력, 노동 숙련도 등을 이유로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여성 실업률은 1차 세계대전 내내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아울러 이와 같은 여성 실업률의 하락에 영향을 준 조치가 있었으니 바로 전시 공업용 원자재 배급이었다. 헬페리히는 전시 원료배급에 대해 두 가지 안을 제시하고 있다.
①모든 국내 기업은 공업용 원자재를 배급 받는다. 배급량은 공장 생산성에 따라 결정된다.
②제조역량이 가장 강한 공장에게만 배급하며, 나머지 공장은 문을 닫는다. 대신 원자재를 배급 받는 공장은 생산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헬페리히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는 첫 번째 案대로 움직였으나, 전쟁 상황이 악화되자 결국 두 번째 안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전쟁 상황이 악화되자 독일 군부는 15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싸울 수 있는 모든 남성을 징집하고, 전국의 여성으로 하여금 의무 복무를 지게 하는 구국복무조례를 제시했다(1916년). 헬페리히는 이 법안의 실효성에 끝까지 의문을 제기했으나, 헬페리히 본인에 대한 사회민주당의 불신으로 인해 이 법안은 통과되고 말았다. 법안이 통과된 직후 빌헬름2세는 헬페리히에게 자신의 기마상이 그려진 그림을 선물로 주며 위로해주었다 한다.
이 소책자는 헬페리히의 《세계대전》의 일부분을 번역한 것이기에 두서없이 끝나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독일이 유럽 대륙 중앙에 위치해 있었기에 양면전쟁의 늪에 빠져 패전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대륙 중앙에 위치해 있었기에 전시에도 동유럽 대평원과 여러 중립국으로부터 오는 물자를 수입할 수 있었으며, 정부는 중립국에서의 매입 독점과 동맹국과의 단합을 통해 전쟁 중에서도 안정적인 물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독일에서 내륙지대로 향하는 철도는 바그다드 철도와 동유럽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몇몇 철도 노선뿐이었지만, 여전히 다양한 육상 운송수단을 통해 물자 운송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판노니아 초원지대를 가로지르는 다뉴브강을 이용해 강 하구에 도착한 물건을 안전하게 독일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메킨더의 심장지대 이론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그는 대륙에 위치한 국가가 심장지대를 장악한 다음 이 일대의 물자를 이용해 전쟁을 수행할 경우 세계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우리는 심장지대의 물자를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는 국가와의 대규모 전쟁을 기획할 때, 단순한 해상봉쇄만으로 이들의 물자가 빠른 시일 안에 고갈되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함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계획은 비현실적이다.
이제 눈을 돌려 중원 대륙으로 가보자. 장쩌민 재임 시절부터 중국은 중앙아시아와 몽골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대규모 인프라 건설 사업을 계획적으로 진행했으며, 중국 해안지대와 아시아 내륙지대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더해 카스피해와 우르타블락까지 연결된 송유관은 대량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중국 상하이까지 운반하고 있으며, 몽골과 타지키스탄에서는 철강과 희귀 광물이 운반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적 실책으로 인해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이란, 파키스탄, 스리랑카,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아제르바이잔 등 아시아 대륙제국이 점차 미국에 반하는 군사동맹에 편입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미군만이 외로이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자국 해군을 동원해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를 봉쇄한다 하더라도 별다른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 중국은 과거 독일이 그리했던 것처럼 파키스탄과 이란, 캄보디아, 러시아 등지를 통해 자국이 원하는 물건을 수입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더해 경제권력이 중앙기구에 집중된 중국은 (독일과 같이) 전쟁물자를 효율적으로 분배함과 동시에 환율을 통제하여 물가 안정을 꾀할 수도 있다.
고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불가피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 전쟁은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적어도 일부 미국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해상 봉쇄를 통해 중국 내 물자를 빠른 시일 내 고갈시키겠다거나 수입 루트를 막겠다는 아이디어는 소아마비적 생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중국에 대해서는 과거 소련과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 2020년 12월 24일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