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어쩌면 위대한 지정학자-스탈린

계연춘추 2022. 1. 27.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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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령 갈리치아와 판노니아 평원 북동부의 지정학적 의의

https://brunch.co.kr/@96cb4860cbd5418/22 우크라이나령 갈리치아와 판노니아 평원의 지정학적 의의 《심장지대 제국의 지정학》에 대한 지리구조적 해설 |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입지에 대해 말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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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지만(물론 그 누구도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것 같지는 않지만) 지정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스탈린이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당장에 우크라이나 국경을 카르파티아 산맥 안쪽으로 확장한 것과 도나우강 하구河口를 우크라이나에 편입시킨 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스탈린의 전략적 안목에 감탄하게 된다. 대체로 도나우강 같은 거대 하천을 중심으로 하는 수운체계에서 하구의 역할은 중요한데, 이는 대양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모든 운송수단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환승역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이 지역을 장악한 세력은 도나우강과 흑해를 왕래하는 물류 흐름을 감시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도나우강 하구의 지정학적 역할을 고려할 경우, 스탈린이 이 지역을 다른 나라가 아닌 우크라이나에 편입시킨 이유야 사뭇 분명하지 않는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판노니아 평원까지 소련 영토를 확장시킨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스탈린의 국경 설정으로 인해 소련은 아무런 자연 장애물의 방해 없이 불과 몇 시간만에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와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점령할 능력을 갖추게 됐으며, 이는 소련이 냉전 시대 내내 발칸반도 제국을 강력히 통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대신 오늘날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정치적 요인이기도 하다).

몽골의 독립 또한 그렇다. 지금도 베이징은 러시아가 붕괴되어 완충지대가 필요 없어질 경우, 몽골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자 하는데(중국이 팽창할 경우, 러시아 극동 지역과 함께 중국에 병합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 중 하나다), 실제로 중국의 엘리트 층은 여전히 몽골을 “중국의 일부”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가까운 외국(청나라의 번속藩屬) 정도로만 인식하는 일본, 한국, 북한,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태국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심지어 지정학적 조건만 보더라도 ⓐ천산산맥과 장백산맥, 개마고원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첩첩 가로막고 있는 한반도와 ⓑ복잡한 수로와 우림, 그리고 대륙형 국가라기보다는 해양형 국가에 가까운 경제구조를 가진 베트남에 비해 몽골은 고비사막이라는 자연 장애물을 제외하면 중국군대의 진격을 가로막을 요소도 없고, 애초에 한반도·베트남처럼 해양형 경제구조를 발전시켜 중국 외 지역에서 수요 물자를 채울 수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중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과거 넘을 수 없던 고비사막이란 자연 장애물이 더 이상 넘지 못할 장벽이 된 것도 몽골의 독립을 방해하는 요소다. 사실상 몽골은 중국의 팽창한계선 내부에 위치해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장제스에게 몽골의 독립을 요구함으로써 다가오는 미·소 냉전 시대에 친미적인 국민정부 군부 수장 장제스(실상 장제스도 군벌 세력의 하나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가 통치하는 중국과의 마찰에서 국경 분쟁을 최소화하려는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몽골이라는 거대한 완충지대를 만들어 중화제국의 팽창을 저지함과 동시에, 소련 측에 가해지는 군사적 압박을 최대한 줄이려 했던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스탈린의 정치적 염려는 마오의 승리로 인해 괜한 걱정이 되어버렸지만, 만일 장제스가 중국 대륙의 지배자가 됐다면 이는 스탈린의 또 다른 지정학적 승리로 역사에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역으로 소련은 독립국 몽골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몽골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중국 북방 전역을 군사적으로 압박할 수 있게 됐다. 특히나 중국령 만주, 신장 2곳은 소련 군대에게 삼면 포위당한 형국이었는데, 이 같은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은 신장 일대에 대규모 사민정책을 실행해 인종 구성 자체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친소적인 관료들을 몰아내고 베이징에 충성하는 새로운 관료들을 신장 지역 관원으로 임명했다. 특히나 만주지대의 경우, 중국의 군수산업체와 중공업 기지가 있는 곳이라서 시종일관 대규모 병력을 배치해 소련의 이상행동을 감시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중국군이 소련 해체 직전까지도 500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유지한 정치적 요인이 된다.

스탈린의 이 같은 지정학적 전략 때문에 미국은 (나치를 이용해 소련을 북독일 평원으로부터 몰아내려는 처칠의 구상처럼) 소련 아래에 있는 발칸반도와 폴란드, 북독일 평원으로 진출하는 공격적인 전략을 펼치는 것이 아닌 공산권 국가를 포위하는 수준의 수세적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소련의 동유럽 지배가 단순한 정치적 지배가 아닌 지정학적 전략에 기반한 통치 체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같은 소련의 지정학적 지배는 모스크바가 동유럽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기 이전까지 유지될 수 있었으며, 디나르알프스 산맥 안쪽에 위치한 발칸반도 제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던 소련은 북독일 평원과 아프가니스탄, 중국, 한반도, 베트남 등지로 진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냉전 초기 소련의 급작스러운 세력 확장이 가능했던 까닭은 스탈린이 구상한 지정학적 통치기계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패권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문제가 불거지면서 우리는 스탈린의 지정학 전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스탈린이었기에 경제·기술 열세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를 워싱턴과 더불어 세계를 지배하는 패자의 지위에 올릴 수 있었으며, 이 심장지대 제국이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는 키신저-브레진스키와 같이 냉전이라는 세계질서를 만든 또 하나의 위대한 지정학자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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