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횡문黌門과 황문簧門으로 보는 문헌학 내공의 중요성

계연춘추 2022. 1. 22. 16:43

오늘 전남대 남태우 교수가 쓴 《즉자적 음주와 대자적 음주로 보는 술 알레고리》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청나라 때 발간된 《소림광기·황문簧門편》에 소화 한 토막을 소개하여 풍류적 음주문화를 그려보고자 한다.

황문簧門? 저는 당황했습니다. 왜냐면 《소림광기》에 《황문편簧門篇》이라 이름한 텍스트가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몰라서 《소림광기》를 읽어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황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횡문黌門을 잘못 읽은 것 아닐까?

남태우 교수가 번역한 이야기는 실제로 《소림광기·부류부·횡문》에 나오는 내용이기는 합니다. 다만 남태우 교수는 번역도 잘못한 것 같습니다. “홍문紅門”은 월경이 아니라 여성의 음부를 뜻합니다. 수재가 아무리 유교 경전에 능통해도 결국 여성의 자궁에서 나왔다는 뜻인데, 이를 월경이라 번역하니 뜻도 이상해지고 홍자와 횡자의 동음이의 효과를 노린 저자의 유머코드까지 놓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한 남태우 교수는 문헌학 전공자로 알고 있는데, “홍문편”이라 한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편은 여러 이야기를 하나로 묶은 것을 편이라 합니다. 정확히 말해 진한 시대 장편의 간독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 모음을 하나의 “편篇”이라 불렀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제지술의 발전과 함께 간독보다 긴 두루마리 종이에 2-3편의 내용을 담을 수 있자 이를 “권卷”이라 불렀습니다. 훗날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두루마리 종이가 아닌 오늘날과 같은 책 형태의 권 묶음을 만들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이런 권 묶음에는 2-3권 정도의 내용이 들어가는데 이를 “책冊”이라 불렀습니다. 아울러 대형 유서의 등장과 함께 여러 권의 내용이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는 경우가 생겼는데, 이를 “부部”라 불렀습니다. 이들의 관계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표1: 편篇, 권卷, 책冊, 부部 관계도


그럼 《소림광기·부류부·횡문》은 과연 편으로 부를 수 있을까요? 실은 하나의-그것도 500자 미만의-에피소드를 하나의 편으로 부르기에는 이상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처럼 너무 짧은 이야기를 이름으로만 부르기에 허전하다면 (일본 학자들처럼) “횡문조黌門條”라 불러도 되고, 중국 학자들처럼 《소림광기·부류부·횡문》이라 불러도 됩니다. 둘 중 무엇이라 불러도 “횡문편黌門篇”보다는 정확할 것이니까요.

그럼 왜 이와 같은 오독 문제가 발생했을까요?

첫째로는 남태우 교수가 교수라는 직위에 걸맞지 않은 내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문장력 하나로 교수가 된 경우입니다. 이 경우, 남태우 교수의 고전 독해 능력은 의심해볼만 합니다.

둘째로는 남태우 교수가 좋지 못한 판본을 읽었을 경우입니다. 이 경우, 전남대 도서관에 소장된 《소림광기》의 판본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대체로 판본의 필획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고대 중국 상인들이 영리 목적으로 목판을 새로 갈기보다는 기존 목판 글자를 다듬은 다음에 다시 인쇄한 경우입니다. 당연히 책 장사치들은 애초에 이 책이 천만년 이어지리라 생각한 적 없고, 단지 많이 찍어서 돈을 벌 생각만 했기에 목판에 소설 내용을 세긴 다음 대량으로 책을 인쇄했고, 이 때문에 목판이 버티지 못해 판 자체가 갈라지거나 목판의 글자가 부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럴 경우 교과서적인 해답은 당연히 목판을 다시 만드는 것이지만, 돈 벌려고 책 찍는 장사치들이 그럴 리 없겠지요? 이 때문에 장사치들은 솜씨 좋은 목공에게 부탁해 목판을 다시 짜거나, 글자를 다듬는 경우가 있습니다. 간혹 고서를 보면 이상하게 그어진 선이 진한 부분이 있는 반면 흐린 부분이 있는 경우를 보셨을 것인데요, 프린터기의 문제가 아니라 책을 하도 많이 찍는 바람에 목판을 다시 짰다는 증거로 보시면 됩니다. 당연히 이런 목판본 자체가 많이 찍으면 글자도 마모될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 획이 날라가는 경우도 있어서 글자를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도 전남대에 소장된 《소림광기》는 이 같은 목판본으로 찍은 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달리 말하자면 조선 말엽에 찍었거나 중국에서 직접 사 들고 왔다는 뜻인데, 후자면 가치가 없다 할 수 없겠지요?

물론 조선시대에는 중국 소설을 필사筆寫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남태우 교수가 읽은 판본이 필사본인지, 아니면 목간본인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태우 교수의 문헌학 내공이 깊지 않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문헌학에서는 4가지 교간 방법이 있는데, 첫째로는 대교법이요, 둘째로는 본교법이며, 셋째로는 타교법이요, 마지막은 이교법이라 합니다. 대교법은 같은 책의 다른 판본을 놓고 비교하는 것이며, 본교법은 이 책의 전후 텍스트를 살펴서 비교하는 것이며, 타교법은 다른 책에 기록된 똑 같은 내용과 비교하는 것이며, 마지막 이교법은 아무런 문헌적 근거없이 심증만으로 고치는 것을 뜻합니다. 대체로 문장 내용과 글자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경우, 연구자는 자신이 《시경》, 《서경》, 《회남자》, 《한서》, 《후한서》 등 고전을 읽으면서 쌓아 올린 내공을 바탕으로 잘못된 부분의 원래 글자를 유추해야만 하는데, 이를 이교라 합니다. 학자마다 다르지만 베이징대 고전문헌학을 창설하신 인파루陰法魯 선생은 이와 같은 이교법에 상당히 호의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대교와 본교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 타교와 이교로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교법 자체가 누구나 들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이어야 했기에 이 방법을 사용하는 연구자에 대한 요구치가 높습니다. 일단 연구자 본인이 《한서》, 《후한서》와 같은 사서에 능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씨춘추》, 《회남자》와 같은 백과사전류 책도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글 한 편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옳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남태우 교수가 이교법까지 구사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홍문紅門”을 월경이라 잘못 해석한 부분에서 현대 중국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실수는 잘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다 저지를 수 있는 실수입니다. 남태우 교수가 나이가 들어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이고, 베이징대에서 고대 중국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라 한들 횡黌자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조차 우연치 않은 기회에 알게 된 글자라서 이를 모르는 이를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조심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마음을 이 글에 담아봅니다.

※ 2020년 7월 28일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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