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훈묘지명》의 진위 논란에 대해

계연춘추 2022. 1. 19. 02:50

작년 《이훈묘지명》이 발견된 이래 중국과 일본 학계는 둘로 나뉘어 이 묘지명이 위작인지 아닌지를 놓고 다투었다. 대체로 진품설을 주장하는 이는 일본 학계의 금석문 대가 氣賀澤保이며, 위조설을 주장하는 이는 辛德勇 베이징대 교수다(카페에서 공부하다가 마주친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키가 작아서 놀랐다). 대체로 지금 분위기를 보면 일본 학계는 똘똘 뭉쳐 진품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은 진품說(대체로 남쪽 계열 학자들)과 위조품說(대체로 북쪽 계열 학자들) 두 파로 나뉘어 논쟁을 지속하고 있다.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한국에서도 진품설을 지지하는 것 같다.

일단 《이훈묘지명》에 새겨진 명문은 아래와 같다. 논란의 여지가 있어 氣賀澤保의 판독문을 인용하겠다.


大唐故鴻臚寺丞李君墓誌銘并序

公諱訓,字恒。出自隴西,為天下著姓。曾祖亮,随太子洗馬,祖知順,為右千牛,事文皇帝。父元恭,大理少卿兼吏部侍郎。君少有異操,長而介立好學。所以觀古能文,不以曜世。故士友重之,而時人不測也。弱冠以輦脚調補陳留尉,未赴陳留,而吏部君亡。君至性自天,柴毀骨立。禮非玉帛,情豈苴麻。惟是哀心,感傷行路。服闋,歴左率府録事參軍、太子通事舎人、衛尉主簿、鴻臚寺丞。以有道之時,當用人之代,驥足方騁,龍泉在割。豈不偉歟。而天与其才,不与其壽,梁在廈而始構,舟中流而遽覆。嗚呼子罕言命,盖知之矣。享年五十有二。開元廿二年六月廿日,以疾終於河南聖善寺之别院。即以其月廿五日,權殯于洛陽感德郷之原。夫旐以書名,誌以誄行。乃勒石作銘云。洪惟夫子,灼灼其芳。道足經世,言而有章。亦既來仕,休聞烈光。如何不淑,弃代云亡。其引也盖殯也,用紀乎山崗。

秘書丞褚思光文 日本國朝臣俻書




내 생각을 말하자면 위조품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① 우선 “하서의 저명한 성씨”라는 부분부터 문제 삼고 싶다. 《이훈부인 왕씨묘지명》에는 분명 이훈이 “성황제의 10대 후손”이라 적혀 있는데, 여기서의 성황제란 서량 흥성황제 이호를 뜻하는 것 같다. 당시 중국은 보학이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관직에 오른 문인들의 계보는 대체로 조정에서 파악하고 있던 실정이라 거짓된 내용일 리 없다. 아울러 자신이 흥성황제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 못해도 증조부 이래 계보를 적었을 것 같은데 왜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 3대의 관직만을 적었을까? 동일하게 흥성황제의 후손인 《대당 농서 이부군 수공덕비기》만 보더라도 흥성황제가 동진의 책봉을 받은 사실과 자신의 6대조부터 아버지까지의 관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이훈부인 묘지명》이 아닌 본인 묘지명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와야 하는데, 증조부 이상 기록이 전혀 등장하고 있지 않다.

② 계보에 기록된 관직명도 이상하다. 여기서는 증조 이량의 태자세마, 조부 이지순의 우천우, 이훈의 위위주부에 대해 생각해보자.

증조 이량:《수서》에 따르면 수나라 때 태자세마 직을 받은 이는 소기, 조의신, 이강, 위세약, 유숙, 육상 등 5명인데, 태자세마는 散官인지라 불의의 사고로 일찍 죽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로 관직이 세마로 끝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관직명에 태자세마만 기록되어 있을 경우, 고인 사후 태자세마를 추증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일례로 《한림시조 조산대부 수양주장사 상주국 사비어대 모백정 전개》에는 증조부가 증 태자세마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추증 관례상 아들의 관직이 높아야 아버지가 비교적 고위직 품계를 추증 받을 수 있는데 그의 아들이 우천우 모직이었던 것으로 보아 아버지에게 추증할 만한 관직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대당 고 조의랑 행 하남부 참조참군사 상주국 청하 최부군 묘지명》과 《당 고 조의대부 회주장사 상주국 경조 위공 묘지명》에는 조부 최세제, 조부 위인검을 모두 “황조 태자세마”라 하였으니, 일단 태자세마는 문제없는 샘 치고 넘어가도록 하자.

조부 이지순: 본격적인 문제는 조부 이지순의 관직인 천우위부터 시작된다. 천우위는 당연 황제를 호위하는 곳이니 이상할 것이야 없지만, 문제는 이지순이 우천우위에서 맡은 직함이 다른 문헌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통상적으로 당나라 때 묘지명을 살펴보면 우천우위 대장군(《태상사 협률량 정공 고 부인 이씨 묘지명》), 우천우위 응양장군(《대당 고 복주자사 태원 곽부군 묘지명》), 우천우위 장군(《대당 고 공적사 묘지명》), 우천우비신(《대당 고 흡주자사 부마도위 왕군 묘지명》, 《대당 고 우위위장군 상주국 안부군 묘지명》) 등 천우위에 속할 경우 반드시 고인이 생전에 맡은 직함이 들어가야 한다.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바로 태자천우다(《풍왕부 호조 농서 이군 고 부인 묘지명》). 그러나 이조차 생각해보면 태자천우라 해봐야 태자천우비신을 뜻하는 것이기에 그런 것이지 다른 직책이었다면 반드시 기재했을 것이다. 아울러 조부 이지선은 분명 당 태종을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정상적인 경우라면 마땅히 그의 직함(ex. 장군)이 나와야 하는데 이 비문에는 이 같은 내용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물론 비신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직함이 언급되어야 정상 아닌가 생각해 본다.

ⓒ위위주부라는 명칭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이는 위위사주부를 줄인 것인데, 왜 홍록사승은 홍록승으로 줄이지 않았을까? 아울러 대체로 묘지명에서는 위위사주부라 전명을 기재하는 경우가 많은데 위위주부라 줄인 것은 석연치 않다.

② 나아가 “문황제”라는 묘호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통상적으로 문황제는 당태종을 지칭한다 알려져 있지만 《당 종정소경 이공 묘지명》에서는 덕종을 문황제로 칭한 예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황제들과 혼동되는 것을 피하고자 당고종 이후의 묘지명에서는 당태종을 지칭할 때 대체로 “태종 문황제”라 칭한다. 따라서 당 태종을 지칭할 때 “태종 문황제”가 아닌 “문황제”만을 단독 사용한 경우는 아주 드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③ 또한 辛德勇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훈이 세상을 떠날 당시의 나이도 석연치 않다. 분명 《이훈부인 묘지명》에 따르면 큰 아들이 개원 2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훈부인 묘지명》에서는 그녀가 남편없이 홀로 자식을 키운 어려움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큰 아들이 아무리 빨리 관직에 올랐다 하더라도 20대 초중반일 것이니, 아버지 이훈이 세상을 떠날 무렵의 나이는 빠르면 30대 후반, 늦어도 40대 초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새로이 발견된 《이훈 묘지명》에서는 52세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게 일찍 죽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이훈부인 왕씨가 자식을 혼자 키웠다는 《이훈부인 묘지명》의 기록과도 맞지 않다.

④ 또한 《이훈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개원 22년 하남 성선사의 별원에서 서거했다 하는데, 《이훈부인 왕씨 묘지명》에 따르면 홍록승 관사에서 죽었다고 한다. 왜 이리도 기록이 엇갈리는 것일까? 辛德勇 교수는 이를 위조의 결정적 증거라 보는데 나 또한 辛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을 지지하는 바다. 설사 장안의 홍록사 관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낙양에도 홍록사 관사는 있었기에 그가 홍록사의 관사에서 죽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⑤ 이외에도 이 비문이 위조품인 증거는 많다. 이 묘지명에 나오는 이원공과 이름자가 같은 사람이 마침 당나라 때 등장한다. 바로 중종조의 유명한 탐관인 이원공인데 사서 기록에 따르면 그 역시 대리소경, 이부시랑 직을 맡았다 한다. 아마도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또 다른 연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훈묘지명》에 따르면 그가 734년에 사망했으며, 사망할 당시의 나이는 52세라 밝히고 있다. 대체로 나이는 虛歲로 계산할 것이니 그가 20세가 됐을 때는 701년, 측천무후 장안 원년이다. 그런데 이원공은 측천무후 시대도 아닌 중종 경룡 연간(707-710년)에 들어서 비로소 이부시랑에 임명되었다. 도대체 이 시간차는 어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⑥그리고 《이훈묘지명》에 따르면 개원 22년 비서승은 저사광이라는 사람인데 이 또한 사서의 기록에 부합하지 않는다. 《구당서∙위빈전》에 따르면 개원 17년(730년)부터 천보 초까지의 비서승은 위빈이었다. 비서성의 편제는 《신당서∙백관지》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승은 단 한명이며 종5품 관이다. 아울러 비서승은 결코 낮은 관직이 아닌지라 저서광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을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가 개원 7년의 과거급제자라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⑦아울러 비문에 등장하는 연각 또한 묘지명에 나오는 것이 석연치 않다. 대체로 연각은 아버지가 고위 공직자인 이들을 뜻하는데, 다른 것도 아닌 사자의 공덕을 칭송하는 묘지명에서 연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이 타당한가? 도대체 누가 사자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에다가 “고인은 포르쉐 타고 다니다가 검찰청 수사관이 됐다”고 쓰는가? 물론 연각이 무관의 공덕을 칭송하는 묘지명에서는 정말 드물게 나오지만(ex. 《대당 고 팽주 당현령 위부군 묘지명》) 과거 급제를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는 문관 묘지명에서 사용된 예는 단 한 차례도 없다. 또한 음서로 관직에 오른 이들은 대체로 무관 품계를 주지, 이훈처럼 홍록사승까지 오른 케이스는 아주 특별한 경우 아닐까 생각된다.

⑧ 끝으로 辛德勇 교수는 피휘 문제를 지적했다. 대체로 당나라 때 텍스트는 당 태종 이세민의 이름인 世民 두 글자를 피하는데, 《이훈묘지명》에서는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자.

이 사건으로 일본 학계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자료를 찾고 생각하면 위조품이라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비석임에도 氣賀澤保를 비롯한 일본 중국 고대사 연구계의 원로들이 총 동원되어 진품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해도 결국 위조품은 위조품에 불과하며, 사료를 찾다 보면 진위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다만 일본학계에서 “日本國朝臣俻” 여섯 글자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진품이라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

아울러 이 진위 논쟁 과정에서 일본의 금석학 연구계와 서예 연구가, 심지어 중국학 연구자들까지 총 동원되어 진품설을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이 비문의 위조 사실이 밝혀진 이후, 일본 학계 전체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발전하리라 본다. 이들의 나이와 경력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학자라는 이름에 걸 맞는 행동을 했는가? 나는 일본 학계의 위신이 땅바닥에 떨어진 다음,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조용히 넘어갈 수 있던 사건을 일본 학계 모두가 나서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이즈를 키웠다.

솔직히 말해 허탈하다. 이런 3류 위조품에 놀아나는 것이 국내 연구자들이 그토록 존중해 마지 않던 일본 학계의 수준이라니.

후세 연구자들이 일본학계와 이들을 추종했던 우리를 얼마나 비웃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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