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신채호 《조선상고사》의 䂺麗 정벌 해석에 대하여

계연춘추 2022. 1. 13. 12:58

오늘 《광개토왕릉비》의 탁본을 보면서 관련 자료를 검색하는데, 신채호 선생이 비문의 토욕을 토욕혼이라 해석했다는 주장을 봤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런 내용은 없었기에 오늘 확인 차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봤다.

《조선상고사》제7편 《고구려·백제 두나라의 충돌》 제3장 《광개토대왕의 북진 정책과 선비 정복》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고구려 태자 談德이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논데, 䂺麗가 자주 변경을 침노하므로 즉위 5년, 기원 395년에 원정군을 일으켜 파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그 부락 6, 7 백을 파괴하고 소·말·양을 노획하여 돌아오니, 파부산은 《修文備史》에 지금 陰山山脈의 臥龍이라 하였고, 부산은 지금 甘蕭省 서북쪽의 阿拉善山이라 하였으며, 염수는 《蒙古地誌》에 의하면 소금기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吉蘭泰란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더미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보면 대개 광개토왕의 발자취가 지금의 甘蕭省 서북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의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

일단 저 지명들을 다 찾아보자(아래 지도를 참조하라).

광개토왕의 䂺麗 정복로


《수문비사》란 고염무顧炎武가 쓴 《황명수문비사皇明脩文備史》를 뜻하는 것 같은데,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자료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도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그 가치를 발견했음을 생각하면, 신채호의 안목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실제로 오늘날 중국에서 몽골학 연구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료 가운데 하나다). 《몽고지지》는 아마도 일본에서 편찬한 《지나지지支那地誌》 몽고지부蒙古之部의 단행본을 뜻하는 것 같다. 듣기로는 《지나지지》에서 몽고지부(제15권 이하)만 따로 때어 《몽고지지》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적이 있다고 한다. 《황명수분비사》는 나도 봤지만, 《지나지지》는 본 적이 없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다만 《지나지지》 몽고지부에 기록된 상당수 내용은 《몽고지》에 실렸으니, 일단 양자가 비슷하다는 전제 하에 비평을 해보도록 하겠다.

보면 알겠지만 저 지명들은 토욕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臥龍은 張家界 북쪽의 臥龍圖라는 곳인데, 음산산맥 동단에 위치해 있으며, 阿拉善山은 賀蘭山의 다른 이름이다. 吉蘭泰는 지금도 사용되는 지명이며, 오늘날에도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필자가 신채호 선생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상은 정 반대다. 더 정확히 말해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식량 생산량 문제가 있는데, 대체로 중세기 중국인들의 하루 식량 소비량은 1.44근으로 알려져 있다. 䂺麗 정벌은 광개토왕이 친정했던 원정임을 고려하면 병력 규모는 못해도 3-4만, 원정 기간은 대략 1년 정도 잡아먹은 것 같으니 일단 8개월로 잡아보자. 그럼 못해도 5180-6910톤의 쌀이 소요된다는 뜻이다(참고로 말 먹이는 계수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말먹이 외에도 저 군량을 운반하는 낙타와 말 먹이도 계수되야 한다. 문제는 저 당시 고구려가 실질적으로 확보한 지역은 낙랑 일대뿐이었다는 점이다. 자세한 자료가 없다 보니 더 이상의 추정은 어렵지만, 솔직히 요동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저 정도의 대규모 군대를 이동하는 것이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당시 낙랑 일대 생산량으로는 50만명만 부양 가능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다만 신체호는 䂺麗를 유연의 음차로 봤는데, 이는 오늘에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학설이라 생각된다. 당시 유연은 탁발위의 공격을 받아 막북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상황이었다. 서쪽으로는 언기焉耆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조선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쩌면 광개토왕은 당시 막북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유연과 싸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유연의 구두벌가한丘豆伐可汗과 자웅을 겨룬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채호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광개토왕의 䂺麗 정벌은 어쩌면 유연의 세력 확장을 막은 일대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견해임은 분명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채호의 주장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일단 신채호는 당시 유연이 막남에서 북위를 공격을 받아 막북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망각했으며, 이 때문에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지명을 모두 막남에서 찾으려 했다. 이로 인해 괴이한 사설邪說을 믿는 무리가 이를 비문에 나오는 토곡[土谷]과 연관 지어 토욕혼까지 정벌했다는 공상과학소설을 쓰게 만들었으니, 붓으로 지은 죄가 가볍지 않다.

※ 탁본에 나오는 민족명이 碑麗일지 䂺麗일지 알 수 없어 《광개토대왕릉비탁본도록》에 수록된 연세대학교 탁본을 봤다. 솔직히 碑라 하기에도 애매하고, 䂺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단지 소수림왕 당시 거란이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이를 거란과 연결하는 것도 그리 나쁜 추론은 아니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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